Monday, April 26, 2010

퀘이커교와 함석헌선생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선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1960년대에 함석헌은 서구의 퀘이커, 한국의 민중신학, 그리고 <사상계>를 통해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기존의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었던 함석헌이 300년 역사를 가진 종교조직 퀘이커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59년 2월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던 퀘이커 예배모임이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 보다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힘이 모아져야 한다는데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퀘이커가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노예 제도 반대 운동, 여성참정권 주창 등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무교회주의였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퀘이커를‘양심의 소리’ , ‘속의 소리’ , ‘속의 빛’이며, 이 양심의 소리는 곧‘하나님의 소리’ 이자‘역사의 소리’ 라고 했다.


함석헌은 퀘이커가‘새로운 종교’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크게 기독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다만 조금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생각했다. 퀘이커에 참여 퀘이커는 비국교도 전통에 속하는 기독교의 한 종파다. 비국교와 국가 종교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한다. 국가 종교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의 정책에 타협하며 보조를 맞추고 따라간다. 일찍이 기독교가 313년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채택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통치권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를 이용했으며, 이때부터기독교가 잘못되고 변질되었다고 함석헌은 보았다.기독교 지도자가 통치자의 반열에 서서 박해하는 종교로 변질되었으며, 영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종교가 되었고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 정책을 선도하거나 묵인하는 그런 종교가 되었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국가 종교 대신에 영국의 비국교 퀘이커에서그가 희망하는 것들을 조금은 보았기에 참여하며 이렇게 말했다.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2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때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퀘이커와 달리 일반 동양의 전통 사상에서는 전체를 위한 참여정신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어떤 종교나 사상도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공적인 증언은 산골짜기에서의 조용한명상이 아닌 현실 참여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했다. 함석헌은 그런 자신을 외딴 들판의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유랑(流浪)을 계속하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에 함석헌이 구금당했을 때, 영국의 퀘이커들은 이 사건에 참여하여 체포된 8명의 한국인들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했다.또한 세계퀘이커협의회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보내어 그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석방해줄 것을 촉구하였고,


주한 영국대사관에 함석헌을 비폭력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언급한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 포드 대통령에게도 서면을 보내어 남한의 인권 상황을 알리며 박 대통령을 위한 지원을 중지해야한다고 촉구했다. 비폭력평화주의로 독재에 맞서 함석헌은 비폭력 국민운동으로 독재자를 물리칠 것을 강조하였다. 대중강연을 통해 그는 5·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독재정권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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