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힘과 퀘이커교
두 연인이 마주보며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로 말을 주고 받다가 말이 끊긴다. 그러자 황급하게 다른 주제에 대해 말을 이어 나간다. 이번에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금 전처럼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미리 다음의 화제를 머리 속으로 생각하느라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다.
그(녀)는 무엇인가 말하거나 듣고 있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언제 어디서나 이어폰을 떼어놓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회는 쟁취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이다. 그(녀)는 최대한으로 말할 기회를 만들어내어 자기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입을 봉하고 있는 자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그런 '종자'는 얼마 되지 않아 틀림없이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자기선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라, '실패의 지름길'일 뿐이다. 그들은 침묵을 참지 못한다. 침묵은 어색한 것이며 짜증스러운 것이다. 서로 말없이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는 연인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퀘이커교 신자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퀘이커교 신앙에서 침묵은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퀘이커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있다. 바로 모래시계의 비유이다. 모래시계에는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릴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허리'가 있다. 퀘이커교에서 기도와 예배가 모래라면, 모래의 '허리'는 바로 침묵이다. 퀘이커교 신자들은 침묵에 의해 걸러지지 않는 기도를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침묵은 '내적인 빛'과 만나기 위해 꼭 지나가야 하는 통로이다. 퀘이커교에 따르면 인간 각자의 내부에는 신성(神聖)이 심연처럼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그 신성의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 내적인 여행을 떠나야 할 의무가 있다. 침묵 가운데 있는 것은 바로 그 여행의 문을 여는 것이고,침묵은 우리를 온통 뒤바꿔 놓을 여행의 안내자인 것이다. 한마디로 침묵은 인간에게 내려 준 신의 선물인 셈이다.
퀘이커의 집회는 침묵 가운데 이루어진다. 가끔 모임이 완전한 침묵에 사로잡혀 도무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일도 생긴다. 침묵이 깨지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 안에서 '내부의 빛'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을 때이다. 그러면 그 날 모임은 그(녀)가 인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예배가 행해지므로 따로 교직자를 둘 필요가 없다.
퀘이커교는 교회의 계급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내부의 빛'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므로 서로 완벽히 평등하다.
퀘이커교 신자들이 온갖 종류의 인간 불평등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이와같이 인간 속에 있는 신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차별, 성적 차별, 종교차별, 그리고 갖가지 사회-경제적 차별을 그대로 좌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차별행위를 알면서도 그 철폐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 '내부의 빛'에 대한 모독이고, 결국 신에 대한 거역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퀘이커의 침묵은 사회정의를 위한 적극적인 행위와 연결된다. 침묵을 통해 신에 드리는 예배와 사회적인 행동의 차원이 동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밀접히 묶여지는 것이다. 그들의 평화주의는 소극적이지 않고 매우 적극적이다.
1952년 8월 29일 뉴욕의 우드스톡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가 '4분 33초'라는 곡을 선보였을 때 많은 청중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짜증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이도 많았다. 그들은 등장한 피아니스트가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없이 앉아 있는 것을 황당한 관객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만약 그 자리에 퀘이커교 신자들이 있었다면,피아니스트가 마련해준 4분 33초의 침묵을 흡족하게 즐겼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기형도의 시(詩) '소리의 뼈'에 나오는 김교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자신은 침묵함으로써 다음 학기에 학생들의 귀를 밝게 만든 김교수를 퀘이커교 신자들이 낯설어 할 리 없다. 그들은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더욱 충만해지는 오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말의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침묵은 말의 근원이다. 침묵이 있으므로 비로소 말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산사의 절간도 소음에 찌들게 된 요즈음, 나는 우리나라에 퀘이커 신자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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