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30, 2010
Thursday, April 29, 2010
Wednesday, April 28, 2010
온라인선 네 명 건너 다 친구… 세상이 좁아지고 있다
트위터가 바꾼 인간관계…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의 과학
끼리끼리 관계 넘어 동시다발적 연결
몇몇 의견 모이다 급속 확산돼 사회변화
처음 만난 사람과 얘기하다 친구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먹했던 분위기가 금방 화기애애해진다. 세상 참 좁다는데 공감하며 말이다. 세상은 과연 얼마나 좁은 걸까. 전엔 평균 6명만 거치면 모든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4명만 거치면 된다. 이 변화 사이에 '트위터'가 있다.
6단계 분리→4단계 분리
1960년대 후반 스탠리 밀그램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300통의 편지를 캔사스주와 네브라스카주에 뿌렸다. 내용은 그 편지를 보스턴 근교에 사는 아무개에게 전달해달라는 것. 봉투에는 전달자의 이름을 적도록 부탁했다.
아무개에게 배달된 편지가 전달된 경로를 분석한 결과 평균 5.5번의 단계를 거쳤다. 처음 편지를 받은 사람 이후 약 6번째 사람이 아무개라는 말이다. 6단계만 거치면 세상 사람을 모두 알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실험은 '6단계 분리'라고 불리며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와 전산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인스턴트 메신저와 카페, 블로그, 싸이월드,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소통 방식도 점차 진화해왔다. '아는 사람'도 늘었을 법하다.
문수복 KAIST 전산학과 교수팀은 트위터에서 지난해 6∼9월 사용자 4,000만여 명이 남긴 활동 기록을 모아 컴퓨터로 분석했다. 트위터에선 사용자가 자신의 의견이나 관심 있는 정보를 '팔로우(follow)' 또는 '팔로워(follower)'한 사람들과 주고받는다. 분석 결과 트위터에선 '4단계 분리'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문 교수는 "트위터에선 사람들끼리 평균 4.12단계를 거치면 연결됐다"며 "6단계 분리가 4단계 분리로 바뀐 게 트위터만의 영향인지 그 전부터 있던 다른 온라인 네트워크 서비스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단백질 네트워크와 닮은꼴
온라인 네트워크 서비스는 인간관계의 경향도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다. 오프라인 네트워크에선 '유유상종'이 나타난다. 인기 많은 사람은 인기 많은 사람끼리 어울리고, 사장은 사장끼리 만나며 끼리끼리 모인다. 사회학에선 이런 경향을 '호모필리(Homophlily)'라고도 부른다.
어떤 사람의 오프라인 친구 수를 X축에, 친구의 친구 수를 Y축에 표시해 그래프를 그리면 기울기가 양(+)의 값을 갖는 직선이 나온다. 유유상종이 적용되는 경우다. 온라인 친구로 이 그래프를 그리면 상관관계가 없는 그림이 생긴다. 실제로 문 교수팀이 트위터의 팔로우, 팔로워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호모필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강병남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음의 기울기 그래프는 지금까지 생체 내 단백질 상호작용 관계나 항공노선, 웹사이트 링크처럼 기능 면에서 효율이 중요한 네트워크에서 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항공노선도를 보면 모든 도시에 비슷한 수의 항공노선이 있는 게 아니라 많은 항공편을 가진 몇몇 허브(연결고리) 도시가 항공편이 적은 작은 도시를 연결하는 모양새다.
강 교수와 김두철 서울대 물리ㆍ천문학부 교수,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팀은 국내 한 대학의 내부 온라인 네트워크를 분석했다. 보통 오프라인 네트워크는 직장 동료나 대학 동창, 고교 친구처럼 몇 개 그룹으로 나뉘며, 한 사람이 여러 그룹에 동시에 속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강 교수는 "온라인에선 여러 그룹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며 "이들이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며 온라인 인간관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자발적 변화, 티핑 포인트
온라인 네트워크에 개인의 작은 의견들이 모이다 보면 어느 시점을 지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그 시점을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부른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가열하면 점점 뜨거워지다 100℃에 이르자마자 끓기 시작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때는 끓는 시점(100℃)을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고 말한다.
티핑 포인트와 임계점의 차이는 외부 요인의 개입 여부다. 물을 끓게 하려면 외부에서 온도를 높여줘야 한다. 하지만 온라인의 변화는 자발적이다. 몇몇 사람들의 의견이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바뀌는 시점이 외부의 특정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간관계 경향이나 티핑 포인트 같은 사회적 현상을 정량적으로 연구하기에 적합한 데이터가 바로 온라인 네트워크다. 전산학자와 물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이 트위터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활용 가치뿐 아니라 데이터 분량도 크게 늘었다. 최근 영국 과학학술지 '네이처'는 온라인 네트워크로 데이터가 급증한 요즘을 '페타바이트(PB, 1PB=1,000조Byte)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트위터가 바꾼 인간관계…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의 과학
끼리끼리 관계 넘어 동시다발적 연결
몇몇 의견 모이다 급속 확산돼 사회변화
처음 만난 사람과 얘기하다 친구의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서먹했던 분위기가 금방 화기애애해진다. 세상 참 좁다는데 공감하며 말이다. 세상은 과연 얼마나 좁은 걸까. 전엔 평균 6명만 거치면 모든 사람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4명만 거치면 된다. 이 변화 사이에 '트위터'가 있다.
6단계 분리→4단계 분리
1960년대 후반 스탠리 밀그램 미국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는 300통의 편지를 캔사스주와 네브라스카주에 뿌렸다. 내용은 그 편지를 보스턴 근교에 사는 아무개에게 전달해달라는 것. 봉투에는 전달자의 이름을 적도록 부탁했다.
아무개에게 배달된 편지가 전달된 경로를 분석한 결과 평균 5.5번의 단계를 거쳤다. 처음 편지를 받은 사람 이후 약 6번째 사람이 아무개라는 말이다. 6단계만 거치면 세상 사람을 모두 알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실험은 '6단계 분리'라고 불리며 네트워크를 연구하는 물리학자와 전산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세상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인스턴트 메신저와 카페, 블로그, 싸이월드, 페이스북, 트위터 등 온라인 소통 방식도 점차 진화해왔다. '아는 사람'도 늘었을 법하다.
문수복 KAIST 전산학과 교수팀은 트위터에서 지난해 6∼9월 사용자 4,000만여 명이 남긴 활동 기록을 모아 컴퓨터로 분석했다. 트위터에선 사용자가 자신의 의견이나 관심 있는 정보를 '팔로우(follow)' 또는 '팔로워(follower)'한 사람들과 주고받는다. 분석 결과 트위터에선 '4단계 분리'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문 교수는 "트위터에선 사람들끼리 평균 4.12단계를 거치면 연결됐다"며 "6단계 분리가 4단계 분리로 바뀐 게 트위터만의 영향인지 그 전부터 있던 다른 온라인 네트워크 서비스의 영향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단백질 네트워크와 닮은꼴
온라인 네트워크 서비스는 인간관계의 경향도 서서히 변화시키고 있다. 오프라인 네트워크에선 '유유상종'이 나타난다. 인기 많은 사람은 인기 많은 사람끼리 어울리고, 사장은 사장끼리 만나며 끼리끼리 모인다. 사회학에선 이런 경향을 '호모필리(Homophlily)'라고도 부른다.
어떤 사람의 오프라인 친구 수를 X축에, 친구의 친구 수를 Y축에 표시해 그래프를 그리면 기울기가 양(+)의 값을 갖는 직선이 나온다. 유유상종이 적용되는 경우다. 온라인 친구로 이 그래프를 그리면 상관관계가 없는 그림이 생긴다. 실제로 문 교수팀이 트위터의 팔로우, 팔로워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호모필리가 나타나지 않았다.
강병남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음의 기울기 그래프는 지금까지 생체 내 단백질 상호작용 관계나 항공노선, 웹사이트 링크처럼 기능 면에서 효율이 중요한 네트워크에서 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항공노선도를 보면 모든 도시에 비슷한 수의 항공노선이 있는 게 아니라 많은 항공편을 가진 몇몇 허브(연결고리) 도시가 항공편이 적은 작은 도시를 연결하는 모양새다.
강 교수와 김두철 서울대 물리ㆍ천문학부 교수, 정하웅 KAIST 물리학과 교수팀은 국내 한 대학의 내부 온라인 네트워크를 분석했다. 보통 오프라인 네트워크는 직장 동료나 대학 동창, 고교 친구처럼 몇 개 그룹으로 나뉘며, 한 사람이 여러 그룹에 동시에 속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강 교수는 "온라인에선 여러 그룹에서 동시에 활동하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며 "이들이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며 온라인 인간관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자발적 변화, 티핑 포인트
온라인 네트워크에 개인의 작은 의견들이 모이다 보면 어느 시점을 지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그 시점을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라고 부른다. 주전자에 물을 넣고 가열하면 점점 뜨거워지다 100℃에 이르자마자 끓기 시작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때는 끓는 시점(100℃)을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고 말한다.
티핑 포인트와 임계점의 차이는 외부 요인의 개입 여부다. 물을 끓게 하려면 외부에서 온도를 높여줘야 한다. 하지만 온라인의 변화는 자발적이다. 몇몇 사람들의 의견이 사회 전체적인 문제로 바뀌는 시점이 외부의 특정 요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간관계 경향이나 티핑 포인트 같은 사회적 현상을 정량적으로 연구하기에 적합한 데이터가 바로 온라인 네트워크다. 전산학자와 물리학자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이 트위터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활용 가치뿐 아니라 데이터 분량도 크게 늘었다. 최근 영국 과학학술지 '네이처'는 온라인 네트워크로 데이터가 급증한 요즘을 '페타바이트(PB, 1PB=1,000조Byte) 시대'라고 이름 붙였다.
Monday, April 26, 2010
21세기 이삭줍기
"자본주의 뒤집기를 꿈꾸다"
삼십 대 청년 두 명.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출간…"공동체 자본주의는 21세기 이삭줍기"
▲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저자 전병길 씨와 고영 씨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 대안을 꿈꿨다"고 했다. (사진제공 행복발전소)
“노력하면 누구나 보상받는다는 건 가진 사람의 논리에요. 경제·사회적 약자는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봤어요. 기존 자본주의 틀 안에서 어떤 것을 꿈꿀 수 있을까 고민했죠.”
삼십 대 청년 두 명, 전병길, 고영 씨가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사회 양극화를 줄일 대안이 없을까 고민했다. 연구한 결과가 책으로 나왔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의 공동저자 전병길 씨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공생적 자본주의’를 말한다고 했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인정하면서 경제적 약자를 보살피는 틀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말로 ‘공동체 자본주의’라고도 하는데 생태적 공동체 운동과도 연관이 있다.
복잡한 유통과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생산자들이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고 소비자와 생산자가 자본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위코노미(WEconomy)라는 단어도 쓴다. 위코노미는 우리(We)와 경제(Economy)의 합성어로 약자배려․자선․환경보호 등의 사회적 가치를 끌어안은 개념이다. 위코노미를 실현하기 위해 두 명의 저자는 수익금의 5%를 사회적기업인 희망제작소에 기부한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는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마이크로크레딧, 사회책임투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 다섯 영역을 소개하며 이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이라 칭한다. 다음은 저자와의 일문일답이다.
책 서두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그림이 있는데?
그림을 보면 성경 룻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 생각난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갔지만 가난해 생계가 막막했다. 당시는 추수할 때 떨어진 이삭을 그래도 두고 거둬가지 않았다. 농장 주인인 보아스가 이삭 주우러 온 룻에게 후하게 대한다. 두 사람의 자손에서 예수님이 나온다. 이삭을 두는 마음,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이 세대를 살아야 한다. 21세기에 새로운 이삭줍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위코노미다.
위코노미로 소개한 다섯 영역을 소개해달라.
사회적 기업은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을 같이 추구하는 것으로 사회 복지와는 다르다. 사회 복지가 사회 약자에 대한 구제라면 사회적 기업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회적인 서비스까지 생각하는 게 사회적 기업이기 때문이다.
마이크로크레딧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으로, 그들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공정무역은 유통 과정의 폭리를 해결하고 가난한 생산자들에게 제대로 된 원가를 지불하는 방식이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돕는 분위기 자체는 가난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했다. 일하는 과정에서 아동착취 등이 있는지 감시하고 생산지 지역사회를 위해 일정기금을 투자하기도 한다.
사회책임투자는 주식을 투자할 때 안 좋은 일을 하는 기업, 노동자 착취 환경 파괴하는 기업 대신 미래 인류 산업에 투자하거나 사회책임을 다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공헌활동․봉사활동을 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영역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개인이 사회책임투자를 해서 마이크로크레딧 하는 회사를 돕고 마이크로크레딧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회사가 공정무역으로 물건을 수출하고 그것을 사회적기업이 팔고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이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등 서로 연관된 것이 바람직하다.
기독교인의 사례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다섯 가지 영역 모두 기독교인이 시작했다. 사회적기업은 에르가헬름즈 목사가 보스톤 빈민지역에서 만든 굿윌(Good Will)이 시작이다. 구호물자로 돕는 것에 한계를 느낀 에드가헬름즈 목사가 받은 물품을 수선해서 판매하도록 하고 수익금으로 직업 훈련과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오늘날 굿윌은 사회․경제적 소회계층에게 직업재활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공정무역은 영국의 노예해방을 위해 싸웠던 윌리엄 윌버포스와 함께 활동했던 동지인 퀘이커교도들이 시작했다. 노예들이 휴일도 없이 일하면서 생산하는 서인도제도의 설탕을 불매하고 동인도제도의 설탕을 대체 구입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는 노예 제도 폐지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마이크로크레딧도 기독교인인 알 휘태거와 데이비드 부소가 하던 오퍼튜니티 인터내셔널(Opportunity Internatonal)이 확대된 거다. 데이비드 부소는 2004년부터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담보 소액대출 활동도 하고 있다.
사회책임투자는 존 웨슬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존 웨슬리는 자본가들의 비도덕성을 비판하고 노예제도 폐지, 감옥 개선 운동, 빈민 구조 등 실질적인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이웃을 위해 돈의 전부를 사용하라고 외친 존 웨슬리의 영향으로 감리교도 중심으로 비윤리적 기업이나 '죄악 주식'에 투자하지 않는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 퀘이커교도 캐드버리가 시작한 캐드버리(Cadbury)를 꼽을 수 있다. 캐드버리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하늘 아래 평등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노동자의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정원이 있는 주택을 공급했다. 캐드버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선구자다.
▲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 전병길 고영 지음/ 꿈꾸는 터/ 352면/ 1만 4000원
공동체 자본주의에 기독교가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나.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사회적기업이나 공정무역 등에 대해 잘 모르고 되레 비기독교인들이 더 관심이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2000년 이후 인권이나 환경․생명․평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생활협동조합도 이들이 만든 것이 많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부분도 노동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가져왔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여력은 되지만 관심이 부족하다.
현재 높은뜻숭의교회의 보이지 않는 성전 사업을 통해 만든 열매나눔재단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하고 있고 온누리교회에서는 번동 코이노니아라는 장애인직업공동체 사회적 기업을 하고 있다. 사랑의교회에서도 도입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가 윤리적 소비에 관심을 기울이고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투자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 사회적 기업이나 공정무역 기업에 젊은 사람들이 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돈이 있는 교회는 사회적 기업을 돕는 펀드를 만들고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교회에서 강좌나 세미나를 열어 계속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원하는 교회는 어디든 불러 달라.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공동체자본주의가 과연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
미시적인 경제의 대안은 될 수 있다. 금융자본을 개혁하는 등 거시적인 문제의 대안은 되지 않지만 기업이나 소비자를 보는 미시적 문제의 대안은 될 수 있다.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등 영역 자체로 대안이 되기는 어렵지만 상호 유기적인 관계가 원활하면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공정무역은 생산자와 소비자,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의 거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커피를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커피 만드는 회사나 유통 매장이 구배한다면 기업이 사회적책임을 다하면서 공정무역을 활성화 하는 거다. 그 회사에 사회책임투자가 벌어지고 그 성과로 펀드를 넣는 등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거다. 이럴 경우에 다양한 경제적 대안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생산지와 공정무역을 통해 최소한의 일거리와 살거리를 보장한다면 적어도 다음 세대에는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삶을 살도록 기반을 마련하고 다음 세대들이 교육받고 일하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저자 전병길 씨는 "책을 통해 공동체 자본주의를 설명했다"고 말했다.ⓒ뉴스앤조이 김세진
사회적기업의 현황은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사회적기업은 저소득층 일자리 창출에서 시작했다. 자활서비스, 공공근로 등이 확대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인증 받은 곳은 254개다.
이명박 정부가 1000개 정도의 사회적기업에 3년 동안 인건비, 보조 세제, 마케팅 등을 지원한다고 한다. 계속 살아남을지가 문제다.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질이 보장되지 않으면 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사회적기업이 확장하려면 제품의 질과 서비스를 보장하고 소비자 윤리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정부 정책도 일시적 지원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판을 짜주는 뼈대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의 사회적 기업은 일자리 창출에 의미가 있지만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한 데서 넘어서서 취업자가 계속적으로 일할 것인가도 문제다. 자아개발의 욕구 등을 어떻게 만족할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속가능한 고용이 있어야 한다.
‘지속가능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지속가능’을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이 어부다. 어부들은 알을 밴 물고기나 새끼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어장 황폐화를 막기 위해서다. 기업을 경영할 때도 당장 회사의 이익을 취하기보다 회사 전체를 보고 일정 부분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부하지만 다음 세대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서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지속가능’ 경영 마인드가 부족하다. 100원 이익 중에 1원 정도 공헌하면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지속가능 경영을 마케팅이나 장기 전략에 도입하면 효과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교육한 후 엔지니어로 뽑거나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환경 기술을 이용해서 기업 매출을 올리는 사례가 그 예다. 번 돈을 사회에 투자하면서 자신들 회사의 미래가치를 올리는 것이다.
책에서 공동체 자본주의 실천 사례를 소개했다. 멘토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나.
개인적으로는 소비자 운동과 유통에 관심이 있어서 랄프 네이더를 꼽고 싶다. 초창기 소비는 공급자 위주의 소비였는데 랄픈 네이더가 소비자의 힘을 보여줬다. 종종 그를 소비자 운동의 효시로 소개한다.
랄프 네이더는 <어떤 속도로의 위험>이라는 책에서 제너럴 모터스(GM)가 만든 코베어 승용차의 결함을 고백한다. 초기에 GE는 반응하지 않지만 소비자 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자동차 결함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하며 최초로 리콜제를 실시한다. GM은 이를 계기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한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시작한 공익마케팅도 의미 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마케팅을 통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정부 예산이 적자라 노후한 자유의 여신상을 복원하지 못했는데 기업이 복원 프로그램을 실시한 거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카드를 쓸 경우 일부를 자유의 여신상 복원에 쓴 것이다. 그러자 카드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 30%나 성장했다. 소비자들이 소비에 대한 보람을 느끼면서 소비하게 하고 기업은 사회적 문제를 이슈화해서 제품을 판 것이다.
88만 원 세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스펙보다 자신들의 미래 가치를 찾아라. 미래가치는 환경·평화·통일·기후 변화 등 미래 세대가 당면할 문제다. 자신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이슈가 될 이야기에 목표를 잡고 준비해라. 미래가치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라.
많은 젊은이들이 목표로 삼는 대기업․공기업에 취업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된다. 언론에서는 암담한 이야기만 한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새로운 시장 개척이 가능했고 기회도 많았다. 지금은 경제가 성숙기로 가기 때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 힘들다. 기존 일자리는 출혈 성장이다. 기존의 월급 많이 주고 고용이 안정된 일자리는 줄어들면 줄어들지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래 가치에 따라 새로운 사회적기업을 만들 수 있다. 꼭 도시에서 있으려 하지 말고 농촌이나 군소 도시로 가면 기회가 있다. 지역공동체산업을 하는 등 지역 자원을 이용해서 사업할 수 있다. 지역문화적 가치를 살리는 거다. 지방에 있는 청년들도 지방에 할 일이 많은데도 그것보다 스펙을 갖추고 서울에 오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안타깝다.
위코노미는 사회 부조리를 기업가 정신으로 풀어가자는 거다. 사회 양극화나 기후변화, 노령화, 통일․인권 문제, 국제적 경제 불균형 등을 해소하는 일에 나서자.
삼십 대 청년 두 명.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출간…"공동체 자본주의는 21세기 이삭줍기"
▲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저자 전병길 씨와 고영 씨는 "자본주의 틀 안에서 대안을 꿈꿨다"고 했다. (사진제공 행복발전소)
“노력하면 누구나 보상받는다는 건 가진 사람의 논리에요. 경제·사회적 약자는 한계에 부딪히는 것을 봤어요. 기존 자본주의 틀 안에서 어떤 것을 꿈꿀 수 있을까 고민했죠.”
삼십 대 청년 두 명, 전병길, 고영 씨가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사회 양극화를 줄일 대안이 없을까 고민했다. 연구한 결과가 책으로 나왔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의 공동저자 전병길 씨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공생적 자본주의’를 말한다고 했다.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인정하면서 경제적 약자를 보살피는 틀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말로 ‘공동체 자본주의’라고도 하는데 생태적 공동체 운동과도 연관이 있다.
복잡한 유통과정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던 생산자들이 지역 공동체를 형성하고 소비자와 생산자가 자본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위코노미(WEconomy)라는 단어도 쓴다. 위코노미는 우리(We)와 경제(Economy)의 합성어로 약자배려․자선․환경보호 등의 사회적 가치를 끌어안은 개념이다. 위코노미를 실현하기 위해 두 명의 저자는 수익금의 5%를 사회적기업인 희망제작소에 기부한다.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는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마이크로크레딧, 사회책임투자, 기업의 사회적 책임 다섯 영역을 소개하며 이를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이라 칭한다. 다음은 저자와의 일문일답이다.
책 서두에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그림이 있는데?
그림을 보면 성경 룻기에 나오는 한 장면이 생각난다.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갔지만 가난해 생계가 막막했다. 당시는 추수할 때 떨어진 이삭을 그래도 두고 거둬가지 않았다. 농장 주인인 보아스가 이삭 주우러 온 룻에게 후하게 대한다. 두 사람의 자손에서 예수님이 나온다. 이삭을 두는 마음,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이 세대를 살아야 한다. 21세기에 새로운 이삭줍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위코노미다.
위코노미로 소개한 다섯 영역을 소개해달라.
사회적 기업은 경제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을 같이 추구하는 것으로 사회 복지와는 다르다. 사회 복지가 사회 약자에 대한 구제라면 사회적 기업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사회적인 서비스까지 생각하는 게 사회적 기업이기 때문이다.
마이크로크레딧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으로, 그들을 위해 경제적 지원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공정무역은 유통 과정의 폭리를 해결하고 가난한 생산자들에게 제대로 된 원가를 지불하는 방식이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돕는 분위기 자체는 가난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비롯했다. 일하는 과정에서 아동착취 등이 있는지 감시하고 생산지 지역사회를 위해 일정기금을 투자하기도 한다.
사회책임투자는 주식을 투자할 때 안 좋은 일을 하는 기업, 노동자 착취 환경 파괴하는 기업 대신 미래 인류 산업에 투자하거나 사회책임을 다하는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공헌활동․봉사활동을 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영역이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개인이 사회책임투자를 해서 마이크로크레딧 하는 회사를 돕고 마이크로크레딧으로 자금 지원을 받은 회사가 공정무역으로 물건을 수출하고 그것을 사회적기업이 팔고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이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는 등 서로 연관된 것이 바람직하다.
기독교인의 사례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다섯 가지 영역 모두 기독교인이 시작했다. 사회적기업은 에르가헬름즈 목사가 보스톤 빈민지역에서 만든 굿윌(Good Will)이 시작이다. 구호물자로 돕는 것에 한계를 느낀 에드가헬름즈 목사가 받은 물품을 수선해서 판매하도록 하고 수익금으로 직업 훈련과 취업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오늘날 굿윌은 사회․경제적 소회계층에게 직업재활 서비스를 제공하고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공정무역은 영국의 노예해방을 위해 싸웠던 윌리엄 윌버포스와 함께 활동했던 동지인 퀘이커교도들이 시작했다. 노예들이 휴일도 없이 일하면서 생산하는 서인도제도의 설탕을 불매하고 동인도제도의 설탕을 대체 구입하는 운동을 벌였다. 이는 노예 제도 폐지 운동에 영향을 미친다.
마이크로크레딧도 기독교인인 알 휘태거와 데이비드 부소가 하던 오퍼튜니티 인터내셔널(Opportunity Internatonal)이 확대된 거다. 데이비드 부소는 2004년부터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담보 소액대출 활동도 하고 있다.
사회책임투자는 존 웨슬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존 웨슬리는 자본가들의 비도덕성을 비판하고 노예제도 폐지, 감옥 개선 운동, 빈민 구조 등 실질적인 사회 개혁을 시도했다. 이웃을 위해 돈의 전부를 사용하라고 외친 존 웨슬리의 영향으로 감리교도 중심으로 비윤리적 기업이나 '죄악 주식'에 투자하지 않는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으로 퀘이커교도 캐드버리가 시작한 캐드버리(Cadbury)를 꼽을 수 있다. 캐드버리는 자본가도 노동자도 하늘 아래 평등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노동자의 작업환경을 개선하고 정원이 있는 주택을 공급했다. 캐드버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선구자다.
▲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 전병길 고영 지음/ 꿈꾸는 터/ 352면/ 1만 4000원
공동체 자본주의에 기독교가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나.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사회적기업이나 공정무역 등에 대해 잘 모르고 되레 비기독교인들이 더 관심이 있다. 1970년대와 80년대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이 2000년 이후 인권이나 환경․생명․평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생활협동조합도 이들이 만든 것이 많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부분도 노동운동을 하시던 분들이 가져왔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여력은 되지만 관심이 부족하다.
현재 높은뜻숭의교회의 보이지 않는 성전 사업을 통해 만든 열매나눔재단에서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하고 있고 온누리교회에서는 번동 코이노니아라는 장애인직업공동체 사회적 기업을 하고 있다. 사랑의교회에서도 도입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교회가 윤리적 소비에 관심을 기울이고 교육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투자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하도록 독려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 사회적 기업이나 공정무역 기업에 젊은 사람들이 진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돈이 있는 교회는 사회적 기업을 돕는 펀드를 만들고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괜찮다.
교회에서 강좌나 세미나를 열어 계속적으로 관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원하는 교회는 어디든 불러 달라.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공동체자본주의가 과연 신자유주의의 대안인가.
미시적인 경제의 대안은 될 수 있다. 금융자본을 개혁하는 등 거시적인 문제의 대안은 되지 않지만 기업이나 소비자를 보는 미시적 문제의 대안은 될 수 있다. 사회적 기업, 공정무역 등 영역 자체로 대안이 되기는 어렵지만 상호 유기적인 관계가 원활하면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공정무역은 생산자와 소비자, 가난한 나라와 부자 나라의 거래의 문제로 이어진다.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커피를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커피 만드는 회사나 유통 매장이 구배한다면 기업이 사회적책임을 다하면서 공정무역을 활성화 하는 거다. 그 회사에 사회책임투자가 벌어지고 그 성과로 펀드를 넣는 등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거다. 이럴 경우에 다양한 경제적 대안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생산지와 공정무역을 통해 최소한의 일거리와 살거리를 보장한다면 적어도 다음 세대에는 혜택이 돌아갈 수 있을 거다. 삶을 살도록 기반을 마련하고 다음 세대들이 교육받고 일하는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새로운 자본주의에 도전하라> 저자 전병길 씨는 "책을 통해 공동체 자본주의를 설명했다"고 말했다.ⓒ뉴스앤조이 김세진
사회적기업의 현황은 어떤가.
우리나라에서 사회적기업은 저소득층 일자리 창출에서 시작했다. 자활서비스, 공공근로 등이 확대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인증 받은 곳은 254개다.
이명박 정부가 1000개 정도의 사회적기업에 3년 동안 인건비, 보조 세제, 마케팅 등을 지원한다고 한다. 계속 살아남을지가 문제다.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의 질이 보장되지 않으면 거품이 될지도 모른다. 사회적기업이 확장하려면 제품의 질과 서비스를 보장하고 소비자 윤리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정부 정책도 일시적 지원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판을 짜주는 뼈대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의 사회적 기업은 일자리 창출에 의미가 있지만 먹고 살 문제를 해결한 데서 넘어서서 취업자가 계속적으로 일할 것인가도 문제다. 자아개발의 욕구 등을 어떻게 만족할 것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지속가능한 고용이 있어야 한다.
‘지속가능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지속가능’을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이 어부다. 어부들은 알을 밴 물고기나 새끼 물고기를 잡지 않는다. 어장 황폐화를 막기 위해서다. 기업을 경영할 때도 당장 회사의 이익을 취하기보다 회사 전체를 보고 일정 부분 희생해야 할 때가 있다. 오늘 부하지만 다음 세대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서 자원을 투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 ‘지속가능’ 경영 마인드가 부족하다. 100원 이익 중에 1원 정도 공헌하면 희생한다고 생각한다. 지속가능 경영을 마케팅이나 장기 전략에 도입하면 효과가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교육한 후 엔지니어로 뽑거나 제너럴 일렉트릭사가 환경 기술을 이용해서 기업 매출을 올리는 사례가 그 예다. 번 돈을 사회에 투자하면서 자신들 회사의 미래가치를 올리는 것이다.
책에서 공동체 자본주의 실천 사례를 소개했다. 멘토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나.
개인적으로는 소비자 운동과 유통에 관심이 있어서 랄프 네이더를 꼽고 싶다. 초창기 소비는 공급자 위주의 소비였는데 랄픈 네이더가 소비자의 힘을 보여줬다. 종종 그를 소비자 운동의 효시로 소개한다.
랄프 네이더는 <어떤 속도로의 위험>이라는 책에서 제너럴 모터스(GM)가 만든 코베어 승용차의 결함을 고백한다. 초기에 GE는 반응하지 않지만 소비자 운동가들의 노력으로 자동차 결함을 인정하고 공개 사과하며 최초로 리콜제를 실시한다. GM은 이를 계기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 사회 공헌 프로그램을 한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시작한 공익마케팅도 의미 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마케팅을 통해 사회에 공헌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정부 예산이 적자라 노후한 자유의 여신상을 복원하지 못했는데 기업이 복원 프로그램을 실시한 거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는 카드를 쓸 경우 일부를 자유의 여신상 복원에 쓴 것이다. 그러자 카드 매출이 폭발적으로 늘어 30%나 성장했다. 소비자들이 소비에 대한 보람을 느끼면서 소비하게 하고 기업은 사회적 문제를 이슈화해서 제품을 판 것이다.
88만 원 세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스펙보다 자신들의 미래 가치를 찾아라. 미래가치는 환경·평화·통일·기후 변화 등 미래 세대가 당면할 문제다. 자신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이슈가 될 이야기에 목표를 잡고 준비해라. 미래가치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라.
많은 젊은이들이 목표로 삼는 대기업․공기업에 취업한 사람은 전체 인구의 10%도 안 된다. 언론에서는 암담한 이야기만 한다. 지금의 기성세대는 새로운 시장 개척이 가능했고 기회도 많았다. 지금은 경제가 성숙기로 가기 때문에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 힘들다. 기존 일자리는 출혈 성장이다. 기존의 월급 많이 주고 고용이 안정된 일자리는 줄어들면 줄어들지 늘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래 가치에 따라 새로운 사회적기업을 만들 수 있다. 꼭 도시에서 있으려 하지 말고 농촌이나 군소 도시로 가면 기회가 있다. 지역공동체산업을 하는 등 지역 자원을 이용해서 사업할 수 있다. 지역문화적 가치를 살리는 거다. 지방에 있는 청년들도 지방에 할 일이 많은데도 그것보다 스펙을 갖추고 서울에 오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안타깝다.
위코노미는 사회 부조리를 기업가 정신으로 풀어가자는 거다. 사회 양극화나 기후변화, 노령화, 통일․인권 문제, 국제적 경제 불균형 등을 해소하는 일에 나서자.
송태흔 칼럼] 위장 전입과 탈세 릴레이 속에서도
정직했던 교회개혁자 조지 폭스 [2009-09-23 06:46]
▲ 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퀘이커 교회의 설립자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토퍼 폭스(Christopher Fox)와 어머니 메리 레이고(Mary Lago)는 매우 교양있고 정직한 크리스천이었다. 폭스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심이 깊고 정직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이 뛰어났다.
위와 같은 좋은 성품 때문에 부모들은 그에게 권위있는 사제(priest)가 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부모의 권고와는 다르게 정직하고 성실한 양털장사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물건을 속여 팔던 사회적 혼돈의 시대에 정직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정직은 당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검은 돈을 챙기지 못하는 정직한 폭스가 그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이다.
1644년 폭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일류대학에서 공부했다고 참된 그리스도 일꾼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계신다”는 제대로 된 신학을 선포하며 혼미한 세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164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메리카 지역까지 맨손으로 돌아다니면서 가슴에 지닌 참 진리를 담대하게 전했다. 국가 전복을 위한 반란을 주도한다는 이유로 한때 권력자들에게 오해를 받아 국가기관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주위의 수많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폭스는 올바른 사회를 세우기 위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다. 어려움 중에 그의 영혼은 무게와 깊이가 더해졌고, 말과 행실도 매우 진지해져 갔다.
폭스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접하며 사회의 약자(고아, 과부, 나그네)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성경적 기독교라고 가르쳤다. 당시 사회악(惡)인 노예들을 학대하지 말고 늘 사랑으로 대하라고 성도들에게 권고했다. 노예들에게도 주인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하고 정직할 것을 동시에 충고했다. 위와 같은 그의 견해는 후배들에게 계승 발전돼, 미국 퀘이커 교도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을 주도하는 시발점이 됐다.
폭스는 사람을 차별하는 뜻에서 낮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던 당시의 호칭 ‘You’를 사용하지 말도록 권고, 대신 모든 사람들을 같이 높이는 Thou(그대), Thee를 사용하도록 권면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모자를 벗어야 된다는 악습도 폐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662년 영국에서는 이러한 사회 평등운동에 가담한 퀘이커 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률안이 통과됐다. 의회가 높은 신분인 국왕에게 맹세를 거부하거나 맹세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행위는 불법이며, 하나님의 말씀과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성경적인 인간 평등운동을 주도했던 폭스는 체포됐고, 재판관들은 잉글랜드 국왕의 주권과 그에 대한 충성을 입으로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폭스는 평생 한번도 사람에게 맹세를 한 적이 없으며 사람들과 약속이나 계약을 맺은 일도 없다면서 국왕에 대한 맹세 선언을 거부했다. 결국 폭스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죄로 다른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과 함께 강제 투옥됐다.
성경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주도한 폭스 때문에 영국 의회는 1664년에 국교 모임을 제외하고 다섯 사람 이상 모이는 종교 집회를 모두 금했고, 국왕에 대한 복종 선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무조건 형사 처벌한다는 비밀집회법(Conventicle Act)을 통과시켰다. 폭스를 포함한 수많은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이 법에 따라 또다시 투옥됐고, 가장을 잃은 식구들은 엄청난 경제·사회적 고난을 받았다. 폭스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가장이 없는 가정을 돕기 위한 월회(monthly meeting)를 조직했다.
장기간의 전도여행과 수차례 투옥으로 노년에 이른 폭스의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한때는 눈과 귀가 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민들에게 전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형제 국가인 아메리카로 건너가 여러 섬들을 돌면서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을 확보했고, 국가로부터 억압당하는 그들을 복음으로 격려하며 진리만을 힘있게 전했다. 소외된 토착 주민들(인디언)을 찾아 평등을 강조하는 순수 복음집회를 열기도 했다. 추장을 비롯한 부족의 의회원 및 수많은 주민들이 참여, 폭스가 전하는 신실한 복음에 공감하고 크리스천이 되기도 했다. 폭스는 매우 담대하고 솔직했으며, 독창적이었고 그의 영혼은 항상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해 늘 충직했다.
17세기 정치적 혼란을 틈타 물건을 속여 팔고 부당하게 재판하던 속임의 시대를 역류해 퀘이커 교파를 세우고 진실한 삶을 강조하며 인생을 펼쳤던 그는 진정한 복음적 사회개혁자였다. 폭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늘 가슴에 지니고 살았으며, 성경 진리만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일에 철저하게 헌신했다. 사람들의 오해를 무릅쓰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복음만을 전했고, 전도를 위해서는 피곤하고 위험한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던 시대적 진리의 종이었다.
특히 그는 성경에 있는 참된 예배로의 개혁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만연했던 모양뿐인 허상의 예배를 철저히 거절하고, 내용 있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불평등한 당시 사회의 관습과 수직 구조를 신앙의 빛 아래 개혁하려고 힘을 다한 진정한 사회 개혁가요, 신실한 크리스천 지도자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향한 개혁의 바람은 계속 불어야 한다. 성경에 벗어난 무분별한 진리의 외침은 즉각 교체해야 하고, 거짓과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와 사회의 정책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국회청문회를 통해 드러나는 장관 후보자들의 위장전입·탈세·자녀 병역기피 문제 등은 오늘날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사회는 지금 고위층을 중심으로 불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고, 그것들을 부추기는 악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법을 제대로 지키면 칭찬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을 당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이런 때 조지 폭스 같은 하나님 중심의 진실한 지도자가 출현해 목을 내놓고 정직을 외치는 복음 운동, 사회 개혁운동을 주도해야 한다. 정직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교회와 사회를 성경대로 개혁해 나갈 때 우리 교회와 사회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정직했던 교회개혁자 조지 폭스 [2009-09-23 06:46]
▲ 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퀘이커 교회의 설립자 조지 폭스는 영국 중부의 레스터셔(지금의 페니 드레이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크리스토퍼 폭스(Christopher Fox)와 어머니 메리 레이고(Mary Lago)는 매우 교양있고 정직한 크리스천이었다. 폭스는 어려서부터 부모의 영향으로 신앙심이 깊고 정직했으며, 침착하고 분별력이 뛰어났다.
위와 같은 좋은 성품 때문에 부모들은 그에게 권위있는 사제(priest)가 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부모의 권고와는 다르게 정직하고 성실한 양털장사로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물건을 속여 팔던 사회적 혼돈의 시대에 정직한 크리스천의 모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정직은 당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검은 돈을 챙기지 못하는 정직한 폭스가 그들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이다.
1644년 폭스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들이어야 한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일류대학에서 공부했다고 참된 그리스도 일꾼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계신다”는 제대로 된 신학을 선포하며 혼미한 세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164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아메리카 지역까지 맨손으로 돌아다니면서 가슴에 지닌 참 진리를 담대하게 전했다. 국가 전복을 위한 반란을 주도한다는 이유로 한때 권력자들에게 오해를 받아 국가기관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다. 주위의 수많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폭스는 올바른 사회를 세우기 위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했다. 어려움 중에 그의 영혼은 무게와 깊이가 더해졌고, 말과 행실도 매우 진지해져 갔다.
폭스는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접하며 사회의 약자(고아, 과부, 나그네)를 찾아보고 돌보는 것이 참된 성경적 기독교라고 가르쳤다. 당시 사회악(惡)인 노예들을 학대하지 말고 늘 사랑으로 대하라고 성도들에게 권고했다. 노예들에게도 주인에게 최선의 의무를 다하고 정직할 것을 동시에 충고했다. 위와 같은 그의 견해는 후배들에게 계승 발전돼, 미국 퀘이커 교도들이 노예제 폐지 운동을 주도하는 시발점이 됐다.
폭스는 사람을 차별하는 뜻에서 낮은 사람들에게 사용하던 당시의 호칭 ‘You’를 사용하지 말도록 권고, 대신 모든 사람들을 같이 높이는 Thou(그대), Thee를 사용하도록 권면했다. 낮은 신분의 사람이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모자를 벗어야 된다는 악습도 폐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662년 영국에서는 이러한 사회 평등운동에 가담한 퀘이커 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한 법률안이 통과됐다. 의회가 높은 신분인 국왕에게 맹세를 거부하거나 맹세하지 못하도록 설득하는 행위는 불법이며, 하나님의 말씀과도 맞지 않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성경적인 인간 평등운동을 주도했던 폭스는 체포됐고, 재판관들은 잉글랜드 국왕의 주권과 그에 대한 충성을 입으로 맹세하도록 강요했다. 폭스는 평생 한번도 사람에게 맹세를 한 적이 없으며 사람들과 약속이나 계약을 맺은 일도 없다면서 국왕에 대한 맹세 선언을 거부했다. 결국 폭스는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한다는 죄로 다른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과 함께 강제 투옥됐다.
성경에 입각한 사회운동을 주도한 폭스 때문에 영국 의회는 1664년에 국교 모임을 제외하고 다섯 사람 이상 모이는 종교 집회를 모두 금했고, 국왕에 대한 복종 선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무조건 형사 처벌한다는 비밀집회법(Conventicle Act)을 통과시켰다. 폭스를 포함한 수많은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이 법에 따라 또다시 투옥됐고, 가장을 잃은 식구들은 엄청난 경제·사회적 고난을 받았다. 폭스는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가장이 없는 가정을 돕기 위한 월회(monthly meeting)를 조직했다.
장기간의 전도여행과 수차례 투옥으로 노년에 이른 폭스의 몸은 지칠대로 지쳤다.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한때는 눈과 귀가 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 국민들에게 전도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형제 국가인 아메리카로 건너가 여러 섬들을 돌면서 퀘이커 교도(친우회원)들을 확보했고, 국가로부터 억압당하는 그들을 복음으로 격려하며 진리만을 힘있게 전했다. 소외된 토착 주민들(인디언)을 찾아 평등을 강조하는 순수 복음집회를 열기도 했다. 추장을 비롯한 부족의 의회원 및 수많은 주민들이 참여, 폭스가 전하는 신실한 복음에 공감하고 크리스천이 되기도 했다. 폭스는 매우 담대하고 솔직했으며, 독창적이었고 그의 영혼은 항상 가장 높은 존재에 대해 늘 충직했다.
17세기 정치적 혼란을 틈타 물건을 속여 팔고 부당하게 재판하던 속임의 시대를 역류해 퀘이커 교파를 세우고 진실한 삶을 강조하며 인생을 펼쳤던 그는 진정한 복음적 사회개혁자였다. 폭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늘 가슴에 지니고 살았으며, 성경 진리만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일에 철저하게 헌신했다. 사람들의 오해를 무릅쓰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 복음만을 전했고, 전도를 위해서는 피곤하고 위험한 항해를 마다하지 않았던 시대적 진리의 종이었다.
특히 그는 성경에 있는 참된 예배로의 개혁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 만연했던 모양뿐인 허상의 예배를 철저히 거절하고, 내용 있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불평등한 당시 사회의 관습과 수직 구조를 신앙의 빛 아래 개혁하려고 힘을 다한 진정한 사회 개혁가요, 신실한 크리스천 지도자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를 향한 개혁의 바람은 계속 불어야 한다. 성경에 벗어난 무분별한 진리의 외침은 즉각 교체해야 하고, 거짓과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교회와 사회의 정책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 국회청문회를 통해 드러나는 장관 후보자들의 위장전입·탈세·자녀 병역기피 문제 등은 오늘날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사회는 지금 고위층을 중심으로 불법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고, 그것들을 부추기는 악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법을 제대로 지키면 칭찬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을 당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이런 때 조지 폭스 같은 하나님 중심의 진실한 지도자가 출현해 목을 내놓고 정직을 외치는 복음 운동, 사회 개혁운동을 주도해야 한다. 정직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교회와 사회를 성경대로 개혁해 나갈 때 우리 교회와 사회는 소망이 있을 것이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 [2009-09-16 08:29]
▲ 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17세기 천로역정이라는 걸작을 남긴 존 번연은 1628년 잉글랜드 베드포드 엘스토우 마을에서 가난한 떠돌이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골 학교에서 영어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배웠지만, 10살의 어린 나이에 장남으로 아버지가 하신 가업을 전수받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17살까지 아버지 밑에서 땜장이 일만 배웠다.
그러나 번연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케임브리지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에 가끔씩 들러 모험담에 관한 중고 책들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의 역작 천로역정에 나오는 배경인 ‘허영의 시장’은 어려운 시절 그가 눈물로 읽었던 책에서 얻은 영감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 청교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설교집, 도덕적 대화록, 하나님의 인도에 관한 책들, 폭스의 순교자열전(Book of Martyrs) 및 방대한 민담과 전승에 관한 책들도 닥치는 대로 독서했다. 폭넓은 그의 독서량은 훗날 그의 탁월한 저서들 안에 그대로 담긴다.
번연의 나이 16세가 되던 1644년은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 해 6월 사랑하는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죽었고, 7월에는 아끼는 누이동생 마거릿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8월에는 아버지가 세 번째 아내를 얻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청교도 혁명이 터진 11월에는 본인이 의회군으로 강제 징집돼 뉴포트 파그넬에 있는 수비대의 보충병이 돼 1647년 7월까지 군복무를 하게 된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크롬웰 군대 내의 급진 개혁파 사람들, 공적 권위에 도전하는 퀘이커 교도 및 랜터파(Ranters) 성도들을 다수 만나 비국교도 들의 열정적 종교생활을 관찰하며 참된 신앙생활에 대해 배우게 된다. 특히 신형군(新形軍·New Model Army) 사람들의 경건한 삶은 번연이 앞으로 비국교도로 개종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그는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을 ‘거룩한 전쟁’이라는 저술에서 설교와 훈련에 매진한 크레던스와 보아너게스라는 에마뉴엘 군대의 중대장들로 설정해 리얼하게 재현했다.
번연은 1649년 거룩성이 몸에 밴 비국교도 아내와 결혼한 뒤 그녀의 영향을 깊게 받아 1655년 비국교도로 전격 개종한다. 개종 이후 신실한 아내와 함께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평소 즐기던 세속적인 춤, 종치기놀이, 시골 들판에서 벌이는 운동경기 같은 모든 오락들을 포기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개종한 존 번연은 1660년 11월 12일 사우스베드포드셔에 있는 로어삼셀의 지방 치안판사 앞에 끌려가 과거 엘리자베스 시대에 포고된 구시대 법령에 따라 영국 국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를 집례한 혐의로 기소당한다. 비국교도적인 예배 집례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문에 그가 서명하지 않자, 1661년 1월 순회재판소는 유죄판결을 언도하고 주(州) 감옥에 그를 가둔다. 그러나 경건한 아내의 헌신과 교회 성도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영적인 암흑기에서 벗어난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번연은 영적인 자서전 ‘넘치는 은혜’를 출판했는데, 자기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회상한다.
번연은 이후 1655년경 베드포드 분리파 교회에 출석해 존 기퍼드로부터 큰 영적인 도움을 받았고,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된다. 베드포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거룩한 생활을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성도로 받아들였으며, 개방적이고 세련된 성찬식(open-communion)을 수행했다. 이때 존 번연은 평신도 설교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나타낸다.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연약한 사람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는 생생한 메시지를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나 자신도 쇠사슬에 묶인 채 그들에게 갔고, 그들에게 주의하라고 설득하기 위해 내 양심에서 얼마 전에 타오르던 불을 담아 갔다”는 그의 신앙고백은 번연이 설교 준비에 얼마나 철저하게 매진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국교에 일치하지 않는 불법적 설교를 했다는 혐의로 다시 감옥에 갇힌다. 그의 두번째 감옥생활은 비록 6개월 정도였지만, 그는 치욕스런 감옥 생활에서 천로역정이라는 대역작을 완성한다. 그 책은 당시 잉글랜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천로역정은 근대 계몽주의 교육이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전, 일반 대중의 민간 전승을 리얼하게 표현한 최후의 걸작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의 개혁주의자 존 번연이 세기적인 역작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주어진 가난과 고통스런 감옥생활 때문이었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중고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은 것이 놀라운 역작을 만들어 낸 뿌리가 됐다. 길지 않은 우리 인생 속에도 수많은 고난들이 닥칠 수 있다. 그것들을 신앙 안에서 역동적으로 극복해 내면 우리들의 뇌에 무너지지 않을 강력한 ‘뇌 근육’이 생기게 된다. 고통은 미래의 문제 해결을 위한 뇌 근육 형성을 위한 필수매체요, 도구이다. 존 번연이 엄청난 고통 중에 대작 천로역정을 쓴 것처럼 말이다. 근래에 불어닥친 신종플루 때문에 발생한 세계적 어려움을 미래 지향적인 뇌 근육 형성 도구로 삼고 역동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때다.
▲ 송태흔 목사(엘림코뮤니오).
17세기 천로역정이라는 걸작을 남긴 존 번연은 1628년 잉글랜드 베드포드 엘스토우 마을에서 가난한 떠돌이 땜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시골 학교에서 영어 읽는 법과 쓰는 법을 배웠지만, 10살의 어린 나이에 장남으로 아버지가 하신 가업을 전수받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고 17살까지 아버지 밑에서 땜장이 일만 배웠다.
그러나 번연은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해 케임브리지 근처에 있는 재래시장에 가끔씩 들러 모험담에 관한 중고 책들을 구입해서 읽었다. 그의 역작 천로역정에 나오는 배경인 ‘허영의 시장’은 어려운 시절 그가 눈물로 읽었던 책에서 얻은 영감을 글로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 청교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설교집, 도덕적 대화록, 하나님의 인도에 관한 책들, 폭스의 순교자열전(Book of Martyrs) 및 방대한 민담과 전승에 관한 책들도 닥치는 대로 독서했다. 폭넓은 그의 독서량은 훗날 그의 탁월한 저서들 안에 그대로 담긴다.
번연의 나이 16세가 되던 1644년은 혹독한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 해 6월 사랑하는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죽었고, 7월에는 아끼는 누이동생 마거릿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8월에는 아버지가 세 번째 아내를 얻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청교도 혁명이 터진 11월에는 본인이 의회군으로 강제 징집돼 뉴포트 파그넬에 있는 수비대의 보충병이 돼 1647년 7월까지 군복무를 하게 된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크롬웰 군대 내의 급진 개혁파 사람들, 공적 권위에 도전하는 퀘이커 교도 및 랜터파(Ranters) 성도들을 다수 만나 비국교도 들의 열정적 종교생활을 관찰하며 참된 신앙생활에 대해 배우게 된다. 특히 신형군(新形軍·New Model Army) 사람들의 경건한 삶은 번연이 앞으로 비국교도로 개종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그는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을 ‘거룩한 전쟁’이라는 저술에서 설교와 훈련에 매진한 크레던스와 보아너게스라는 에마뉴엘 군대의 중대장들로 설정해 리얼하게 재현했다.
번연은 1649년 거룩성이 몸에 밴 비국교도 아내와 결혼한 뒤 그녀의 영향을 깊게 받아 1655년 비국교도로 전격 개종한다. 개종 이후 신실한 아내와 함께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면서 평소 즐기던 세속적인 춤, 종치기놀이, 시골 들판에서 벌이는 운동경기 같은 모든 오락들을 포기하고 경건한 신앙생활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개종한 존 번연은 1660년 11월 12일 사우스베드포드셔에 있는 로어삼셀의 지방 치안판사 앞에 끌려가 과거 엘리자베스 시대에 포고된 구시대 법령에 따라 영국 국교회와 일치하지 않는 예배를 집례한 혐의로 기소당한다. 비국교도적인 예배 집례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문에 그가 서명하지 않자, 1661년 1월 순회재판소는 유죄판결을 언도하고 주(州) 감옥에 그를 가둔다. 그러나 경건한 아내의 헌신과 교회 성도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영적인 암흑기에서 벗어난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번연은 영적인 자서전 ‘넘치는 은혜’를 출판했는데, 자기 영혼의 상태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회상한다.
번연은 이후 1655년경 베드포드 분리파 교회에 출석해 존 기퍼드로부터 큰 영적인 도움을 받았고,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된다. 베드포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거룩한 생활을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성도로 받아들였으며, 개방적이고 세련된 성찬식(open-communion)을 수행했다. 이때 존 번연은 평신도 설교가로서도 탁월한 재능을 나타낸다.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연약한 사람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는 생생한 메시지를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쇠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나 자신도 쇠사슬에 묶인 채 그들에게 갔고, 그들에게 주의하라고 설득하기 위해 내 양심에서 얼마 전에 타오르던 불을 담아 갔다”는 그의 신앙고백은 번연이 설교 준비에 얼마나 철저하게 매진했는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국교에 일치하지 않는 불법적 설교를 했다는 혐의로 다시 감옥에 갇힌다. 그의 두번째 감옥생활은 비록 6개월 정도였지만, 그는 치욕스런 감옥 생활에서 천로역정이라는 대역작을 완성한다. 그 책은 당시 잉글랜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천로역정은 근대 계몽주의 교육이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전, 일반 대중의 민간 전승을 리얼하게 표현한 최후의 걸작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의 개혁주의자 존 번연이 세기적인 역작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주어진 가난과 고통스런 감옥생활 때문이었다. 가난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중고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은 것이 놀라운 역작을 만들어 낸 뿌리가 됐다. 길지 않은 우리 인생 속에도 수많은 고난들이 닥칠 수 있다. 그것들을 신앙 안에서 역동적으로 극복해 내면 우리들의 뇌에 무너지지 않을 강력한 ‘뇌 근육’이 생기게 된다. 고통은 미래의 문제 해결을 위한 뇌 근육 형성을 위한 필수매체요, 도구이다. 존 번연이 엄청난 고통 중에 대작 천로역정을 쓴 것처럼 말이다. 근래에 불어닥친 신종플루 때문에 발생한 세계적 어려움을 미래 지향적인 뇌 근육 형성 도구로 삼고 역동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이 우리들에게 필요한 때다.
퀘이커교와 함석헌선생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선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1960년대에 함석헌은 서구의 퀘이커, 한국의 민중신학, 그리고 <사상계>를 통해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기존의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었던 함석헌이 300년 역사를 가진 종교조직 퀘이커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59년 2월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던 퀘이커 예배모임이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 보다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힘이 모아져야 한다는데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퀘이커가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노예 제도 반대 운동, 여성참정권 주창 등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무교회주의였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퀘이커를‘양심의 소리’ , ‘속의 소리’ , ‘속의 빛’이며, 이 양심의 소리는 곧‘하나님의 소리’ 이자‘역사의 소리’ 라고 했다.
함석헌은 퀘이커가‘새로운 종교’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크게 기독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다만 조금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생각했다. 퀘이커에 참여 퀘이커는 비국교도 전통에 속하는 기독교의 한 종파다. 비국교와 국가 종교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한다. 국가 종교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의 정책에 타협하며 보조를 맞추고 따라간다. 일찍이 기독교가 313년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채택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통치권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를 이용했으며, 이때부터기독교가 잘못되고 변질되었다고 함석헌은 보았다.기독교 지도자가 통치자의 반열에 서서 박해하는 종교로 변질되었으며, 영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종교가 되었고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 정책을 선도하거나 묵인하는 그런 종교가 되었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국가 종교 대신에 영국의 비국교 퀘이커에서그가 희망하는 것들을 조금은 보았기에 참여하며 이렇게 말했다.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2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때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퀘이커와 달리 일반 동양의 전통 사상에서는 전체를 위한 참여정신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어떤 종교나 사상도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공적인 증언은 산골짜기에서의 조용한명상이 아닌 현실 참여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했다. 함석헌은 그런 자신을 외딴 들판의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유랑(流浪)을 계속하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에 함석헌이 구금당했을 때, 영국의 퀘이커들은 이 사건에 참여하여 체포된 8명의 한국인들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했다.또한 세계퀘이커협의회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보내어 그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석방해줄 것을 촉구하였고,
주한 영국대사관에 함석헌을 비폭력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언급한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 포드 대통령에게도 서면을 보내어 남한의 인권 상황을 알리며 박 대통령을 위한 지원을 중지해야한다고 촉구했다. 비폭력평화주의로 독재에 맞서 함석헌은 비폭력 국민운동으로 독재자를 물리칠 것을 강조하였다. 대중강연을 통해 그는 5·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독재정권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유영모 선생의 영향을 받은 함석헌은 선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1960년대에 함석헌은 서구의 퀘이커, 한국의 민중신학, 그리고 <사상계>를 통해 삶의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기존의 교회조직이나 제도에 회의적이었던 함석헌이 300년 역사를 가진 종교조직 퀘이커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1959년 2월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던 퀘이커 예배모임이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 보다 지금 이곳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힘이 모아져야 한다는데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퀘이커가 인종 차별 반대 운동, 노예 제도 반대 운동, 여성참정권 주창 등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무교회주의였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퀘이커를‘양심의 소리’ , ‘속의 소리’ , ‘속의 빛’이며, 이 양심의 소리는 곧‘하나님의 소리’ 이자‘역사의 소리’ 라고 했다.
함석헌은 퀘이커가‘새로운 종교’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근본적으로 크게 기독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다만 조금은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라고 생각했다. 퀘이커에 참여 퀘이커는 비국교도 전통에 속하는 기독교의 한 종파다. 비국교와 국가 종교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한다. 국가 종교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의 정책에 타협하며 보조를 맞추고 따라간다. 일찍이 기독교가 313년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채택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콘스탄틴 대제가 통치권을 강화하면서 기독교를 이용했으며, 이때부터기독교가 잘못되고 변질되었다고 함석헌은 보았다.기독교 지도자가 통치자의 반열에 서서 박해하는 종교로 변질되었으며, 영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종교가 되었고 서구의 제국주의 침략 전쟁 정책을 선도하거나 묵인하는 그런 종교가 되었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국가 종교 대신에 영국의 비국교 퀘이커에서그가 희망하는 것들을 조금은 보았기에 참여하며 이렇게 말했다.
타오르는 활화산 함석헌 2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때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퀘이커와 달리 일반 동양의 전통 사상에서는 전체를 위한 참여정신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함석헌은 어떤 종교나 사상도 사회와 역사를 움직이는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공적인 증언은 산골짜기에서의 조용한명상이 아닌 현실 참여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했다. 함석헌은 그런 자신을 외딴 들판의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유랑(流浪)을 계속하는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에 함석헌이 구금당했을 때, 영국의 퀘이커들은 이 사건에 참여하여 체포된 8명의 한국인들의 석방을 강력히 촉구했다.또한 세계퀘이커협의회도 박정희 대통령에게 서한을보내어 그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석방해줄 것을 촉구하였고,
주한 영국대사관에 함석헌을 비폭력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언급한 항의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 포드 대통령에게도 서면을 보내어 남한의 인권 상황을 알리며 박 대통령을 위한 지원을 중지해야한다고 촉구했다. 비폭력평화주의로 독재에 맞서 함석헌은 비폭력 국민운동으로 독재자를 물리칠 것을 강조하였다. 대중강연을 통해 그는 5·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독재정권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계시는 계속되고 가시적 재림은 없다
한국 퀘이커교를 진단한다 ②/ 교리와 현황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 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그저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한국의 대표적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의 ‘퀘이커 예찬’이다. 퀘이커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이들은 일정한 교회 제도를 택하지 않았기에 큰 조직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면 그들은 개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 현재까지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모임을 가지며 교세를 확산시키고 있다. 동시에 한국교회 종교다원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이에 퀘이커교의 발생배경과 근본사상 그리고 한국전래와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 배경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영국 교회가 로마 천주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개혁운동을 일으켜 17세기에는 영국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그들을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장로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후에 주로 미국을 발판으로 큰 교파로 발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리주의자들 중에 특이한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이 1647년 영국인 죠지 폭스가 창시한 ‘친우회(Friends)’ 또는 ‘퀘이커단(Quakers)’이다.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 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나님을 직접 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며, 특히 사회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크롬웰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엷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있었던 빚 대신 그에게 웨스트뉴저지 개발권을 주었고,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는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안식처가 되었다.
2. 퀘이커교의 교리
첫째, 퀘이커교는 그들 특유의 예배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무언(無言)을 지킨다. 침묵(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성령의 내림을 기다린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성령의 내림과 사역이 있으면 받은 영감을 말한다. 17세기에 이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영감을 받을 때 전신이 떨었다 해서 ‘진동자(Qua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약 영감을 받은 사람이 없으면 무언으로 그 모임은 끝난다. 그들은 직접적 영감을 중시하여 언제든지 새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함석헌은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다. 퀘이커들은 단체로 명상할 때 하나님이 임재한다고 믿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예배형태에 대해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조직신학)는 “과연 퀘이커 모임 가운데 있는 것이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며 “그들은 때때로 성경과 예배 중에 성령의 영감을 구분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퀘이커 사람들은 계속적인 계시(continuing revelation)를 말하는 결과를 내고 만다”고 지적한다. 즉, 퀘이커교도들은 요한복음 1장 9절~18절에 근거해 ‘보편적인 내면의 빛(the universal Inward Light)’을 중요시하면서 이것으로 계속적으로 진리를 계시해 준다고 주장하지만 이 본문이 그런 뜻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모든 신비주의를 허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퀘이커교는 성서가 모든 종교체험에 관한 가장 우수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불변의 진리가 있거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퀘이커에 따르면 “성서는 원천에 관한 방향 제시는 되나 원천 자체는 아니다. 그 원천은 오히려 성령 또는 각자의 내부에 있는 ‘영적 빛’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내적으로, 직접적으로 자기 안에 내주하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성서대학교대학원장 김호식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성경보다 자기들이 직접 받은 계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문제다”며 “이에 반해 개신교는 66권 성경이 모든 신앙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아래 박스 기사 참고).
셋째, 퀘이커교는 내적 계시를 중시하고 성서를 격하시키기 때문에 어떤 교리나 신앙고백서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신학적 사변의 무거운 짐을 바닷가에 다 버렸다고 자랑한다. 퀘이커호주연회에서 펴낸 <청소년을 위한 퀘이커 신앙 안내서>의 교리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싸움을 무조건 반대한다. 따라서 군대에 들어간다거나 전쟁준비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양심적 병역거부).”
“우리는 노예제도,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은 외적인 성례전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례전을 갖지 않는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분이 있다. 그것은 ‘씨’, ‘속의 빛’, ‘사람의 영’ 등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인종이나 종교에도 상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 속에 있는 영을 계발하고 진리를 더 열렬하게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매우 가까이 나아갔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인 악나톤, 인도 왕자 석가모니, 중국 신비주의자 노자, 유대인 이사야 등이 있다.”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힌두교나 유교 또는 그밖의 다른 종교나 철학이 하나님께 향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과 실천을 존중한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교리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퀘이커교도들은 대개 삼위일체 교리, 전전 타락 교리, 죄의 전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 등을 거부하고, 성례가 불필요하다고 본다. 초기 퀘이커 교리는 Robert Barclay(1648~1690)가 쓴 「Apology for the True Christian Divinity」(Amsterdam, 1676)에 요약되어 있고, 19세기 초에 와서는 그들 안에 있던 청교도적이고 재세례파적인 요소들을 모두 버려 버리고 19세기의 지적 정황에 맞게 자신들의 사상을 다시 표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퀘이커는 두 종류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복음주의적 퀘이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이다.
주로 Joseph John Gurney(1788~1847)의 영향 하에서 나타난 복음주의적 퀘이커는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며, 그것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계속적인 계시와 철저한 평화주의(doctrinal pacifism), 그리고 내면의 빛을 통한 구속과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퀘이커들은 목사를 임직시키지는 않지만, 목사를 청빙하기는 한다. 또한 순서를 따라 드리는 예배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복음주의적 퀘이커의 표준적 진술은 ‘리치몬드 선언’(1887)이다.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주의는 부분적으로는 18세기 정적주의적 퀘이커 사상(quietist Quakerism)에서 연원한 것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결합시킨 사상이다. 보편적 내면의 빛 교리를 확장시켜 모든 종교에 그 빛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며 모든 종교들은 다 조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류는 다 하나라고 믿기에 이런 분파의 퀘이커는 평화 운동과 사회봉사 활동에서 매우 활동적이다.”
넷째,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종자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죄의 종자와 신적 종자다. 죄의 종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싹이 트나, 신적 종자는 신으로부터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님의 심방’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방의 하루 또는 한 때를 주어 그가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에 동참하게 한다. 이 하나님의 심방의 때를 가지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마음속에 비치는 빛에 항거하는 사람은 멸망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다.
또, 퀘이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아담의 죄값이 전가되어 있지 않다. 사람이 다 같은 불복종의 죄를 범하고부터 비로소 죄책이 생기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까지 원죄의 책임을 지우는 교리는 잔인하고 자연과 하나님의 자비와 의에 어긋나는 견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아담의 죄의 전가를 거부하는 퀘이커교는 결국 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고, 그 구원의 방도는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가의 여부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섯째, 퀘이커교의 교회는 ‘거룩한 빛,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순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한다. 그 안에는 이미 죽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교도(異敎徒)와 터키 사람과 유대 사람도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눈을 뜨고 은혜의 선물의 정도에 따라 서로 가르치고 교육하고 배려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런데 외적 신앙고백과 외적 의식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다면(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목) 그들은 악마의 꼬임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주장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초기 퀘이커 사상가인 죠지 폭스는 가시적 교회의 배교가 신약 성경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며 배교한 교회에 천주교회와 개신교 모두를 넣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이제 ‘참 교회’를 모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했다. 그 함의는 이제 내면의 빛을 추구하는 이들이 참 교회라는 것이고, 자신들과 이교도 가운데서 이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 이들은 모두 참 교회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후에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에서는 이런 생각이 더 확대되어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섯째, 퀘이커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주의자이다. 따라서 퀘이커교가 병역과 선서를 거절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봉사적 사랑으로써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 점이 다른 기독교신비주의자들과 다른 점이다.
3. 퀘이커교의 한국 전래와 현황
처음 퀘이커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6.25전쟁 직후다. 1953년 전북 군산의 도립병원에서 구제활동을 폈던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의사들을 통해 처음 퀘이커를 접한 군산 사람들이 그들의 침묵예배에 참석하면서 한국 퀘이커가 탄생했다. 퀘이커 봉사자들이 떠난 이후에도 한국인들끼리 자체 모임을 계속해 한국 퀘이커 1세대가 출현했으며 최초의 한국인 퀘이커는 이윤구였다.
1960년대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 데 공감한 함석헌의 가담으로 퀘이커는 한때 크게 부흥했다. 함석헌은 본래 장로교 신자였으나 일본에 건너가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소극적 신앙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퀘이커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퀘이커 지도자였던 브린튼의 영향을 직접 받아 그것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한국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교는 1989년 함석헌 타계 후 내부 혼란과 갈등을 빚으며 10년이 넘도록 예배모임조차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미국 펜들힐에서 정식 퀘이커교도가 되어 귀국한 이후 한국퀘이커에도 활기가 생겼다. 옛 퀘이커 멤버들을 중심으로 원상 복귀를 위해 노력해 다시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서울 신촌의 모임에는 약 50여명의 교도들이 있고, 곧 대전에 모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박성준 교수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는 글을 통해 퀘이커교와 민중신학의 연합을 시도한다. 그는 죠지 폭스는 ‘예수가 이미 재림한 사실을 알리려 했던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죠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음으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계속해서 “죠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며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사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고 해석한다.
이승구 교수는 박성준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결국 그리스도의 가시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고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강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갈 2:20), 바울을 따라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에도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과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했으며, 우리는 그 점을 매우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우리들의 성령님의 은혜 아래서의 삶과 사역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결국 그리스도 사역의 독특성을 파괴하게 된다”며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反)하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문자적, 신체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또 “함석헌은 1970년대 초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그의 씨알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흡사하다”며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알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 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석헌 선생님은 무교회주의사상과도 오랫동안 관련을 갖고 계셨고, 1970년대에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종교적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퀘이커 사상을 항상 변해 가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그를 충실한 퀘이커라고 하기는 어렵다. ‘씨알’ 사상은 퀘이커 사상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영글어진 것이 분명하며, 퀘이커 사상과 민중 신학을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나(따라서 학자들이 그런 논구를 할 수는 있으나)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 참고도서 -----
김나미, <이름이 다른 그들의 신을 말하다>, 2005
김남식,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 운동 연구>, 새순출판사, 1987
김성봉, <빈야드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와신앙, 1996
김영태, <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 인간사랑, 2002
이종성, <교회론(1)>, 대한기독교출판사, 1989
함석헌, <현대의 禪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 1985
박성준,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 <신학사상>109집, 2000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 2002
직접 계시 중시, 교회 조직 거부 "이단성"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보는 퀘이커교
퀘이커교의 이 같은 예배 형태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개신교 신학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노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성서대학교의 이호우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주관적인 성령의 계시, 임재, 조명을 부르짖다가 교회조직과 성경해석, 성경연구, 심지어 일반적 예배조차 거부한다”며 “이것은 최근 범종교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영성수련과 일맥상통한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성령의 빛 또는 내적 조명을 강조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영성을 계발하고 신(하나님)과의 체험을 이룬다는 측면은 최근 동양철학적인 명상이나 마음 수련 즉, 뉴에이지 운동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개인적인 성령의 조명하심도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나 교회 공동체에게 임하는 해석적인 측면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신대대학원 최덕성 교수(역사신학)는 “퀘이커교도들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것은 신앙의 외형성(externality)에 대한 부정과 내면성(internality)에 대한 집착”이라며 “서양인의 사고양식인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서 영국교회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이 외형적인 요소들, 교회라고 하는 조직(헌법, 규례 등), 성찬이라고 하는 물질요소들, 교리나 신학이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규범들을 거부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규정지었다.
특히 최 교수는 “부패한 지상교회의 조직이 가진 모순과 횡포를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이 이해는 된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우리가 연약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에서 외형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성경이 외형적 요소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최 교수는 “로마가톨릭처럼 외적 요소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퀘이커교도들의 주장은 합리적인 면에서나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그리고 ‘역사적 교회’라는 것을 검토해 볼 때도 호소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성서대대학원장 김호식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경험주의적인 신앙노선에서 성경보다 자기들이 직접 받은 계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이단이라고 취급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개신교는 66권 성경이 모든 신앙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는다”면서 “퀘이커는 계시의 현장성을 믿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성경과 대등한 종류의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경의 정경성을 부인하는 면에서 이단이라고 분류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퀘이커는 성령을 받으면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신체 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 빈야드와 오순절 운동과 같은 계열의 ‘성령운동자들’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인본주의 신학 즉, 자신들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경험을 기준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미국이나 남미의 ‘해방신학’이 한국에서 ‘민중신학’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며 “퀘이커교 운동이 현대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퀘이커는 평화주의자’라는 인식에 대해 “평화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적국이 침략해 올 때 방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평화주의는 문제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퀘이커교를 진단한다 ②/ 교리와 현황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 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그저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언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 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한국의 대표적 퀘이커교도였던 함석헌의 ‘퀘이커 예찬’이다. 퀘이커교가 한국에 들어온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다. 이들은 일정한 교회 제도를 택하지 않았기에 큰 조직체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반면 그들은 개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서 많은 동조자를 얻어 현재까지 그들 특유의 방법으로 모임을 가지며 교세를 확산시키고 있다. 동시에 한국교회 종교다원주의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왔다. 이에 퀘이커교의 발생배경과 근본사상 그리고 한국전래와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역사적 배경
16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여러 가지 부작용을 일으켰다. 영국 교회가 로마 천주교회와 큰 차이가 없다고 본 많은 신도들이 자기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개혁운동을 일으켜 17세기에는 영국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그들을 분리주의자(The separatists)라고 부른다. 그 중에는 장로교회, 침례교회, 회중교회 등이 있었다. 이들 분리주의자들은 후에 주로 미국을 발판으로 큰 교파로 발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분리주의자들 중에 특이한 그룹이 있었는데 그것이 1647년 영국인 죠지 폭스가 창시한 ‘친우회(Friends)’ 또는 ‘퀘이커단(Quakers)’이다.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 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나님을 직접 내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며, 특히 사회 개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크롬웰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엷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있었던 빚 대신 그에게 웨스트뉴저지 개발권을 주었고,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는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안식처가 되었다.
2. 퀘이커교의 교리
첫째, 퀘이커교는 그들 특유의 예배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예배라고 할 수 있는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다.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무언(無言)을 지킨다. 침묵(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성령의 내림을 기다린다.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이나 누구든지 그 자리에서 성령의 내림과 사역이 있으면 받은 영감을 말한다. 17세기에 이 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영감을 받을 때 전신이 떨었다 해서 ‘진동자(Qua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만약 영감을 받은 사람이 없으면 무언으로 그 모임은 끝난다. 그들은 직접적 영감을 중시하여 언제든지 새 계시를 받는다고 한다. 함석헌은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이다. 퀘이커들은 단체로 명상할 때 하나님이 임재한다고 믿는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예배형태에 대해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조직신학)는 “과연 퀘이커 모임 가운데 있는 것이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인가 하는 것이 문제”라며 “그들은 때때로 성경과 예배 중에 성령의 영감을 구분하여 말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퀘이커 사람들은 계속적인 계시(continuing revelation)를 말하는 결과를 내고 만다”고 지적한다. 즉, 퀘이커교도들은 요한복음 1장 9절~18절에 근거해 ‘보편적인 내면의 빛(the universal Inward Light)’을 중요시하면서 이것으로 계속적으로 진리를 계시해 준다고 주장하지만 이 본문이 그런 뜻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모든 신비주의를 허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퀘이커교는 성서가 모든 종교체험에 관한 가장 우수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안에 불변의 진리가 있거나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퀘이커에 따르면 “성서는 원천에 관한 방향 제시는 되나 원천 자체는 아니다. 그 원천은 오히려 성령 또는 각자의 내부에 있는 ‘영적 빛’이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내적으로, 직접적으로 자기 안에 내주하는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국성서대학교대학원장 김호식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성경보다 자기들이 직접 받은 계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문제다”며 “이에 반해 개신교는 66권 성경이 모든 신앙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아래 박스 기사 참고).
셋째, 퀘이커교는 내적 계시를 중시하고 성서를 격하시키기 때문에 어떤 교리나 신앙고백서를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모든 신학적 사변의 무거운 짐을 바닷가에 다 버렸다고 자랑한다. 퀘이커호주연회에서 펴낸 <청소년을 위한 퀘이커 신앙 안내서>의 교리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모든 외적인 전쟁과 싸움을 무조건 반대한다. 따라서 군대에 들어간다거나 전쟁준비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다(양심적 병역거부).”
“우리는 노예제도, 인종차별을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권속의 일원이 된다고 믿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일은 외적인 성례전 없이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례전을 갖지 않는다.”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부분이 있다. 그것은 ‘씨’, ‘속의 빛’, ‘사람의 영’ 등으로 불려왔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떤 인종이나 종교에도 상관없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 속에 있는 영을 계발하고 진리를 더 열렬하게 추구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매우 가까이 나아갔다. 이들 중에는 이집트인 악나톤, 인도 왕자 석가모니, 중국 신비주의자 노자, 유대인 이사야 등이 있다.”
“우리는 비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힌두교나 유교 또는 그밖의 다른 종교나 철학이 하나님께 향하는 또 다른 길을 보여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과 실천을 존중한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교리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퀘이커교도들은 대개 삼위일체 교리, 전전 타락 교리, 죄의 전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교리 등을 거부하고, 성례가 불필요하다고 본다. 초기 퀘이커 교리는 Robert Barclay(1648~1690)가 쓴 「Apology for the True Christian Divinity」(Amsterdam, 1676)에 요약되어 있고, 19세기 초에 와서는 그들 안에 있던 청교도적이고 재세례파적인 요소들을 모두 버려 버리고 19세기의 지적 정황에 맞게 자신들의 사상을 다시 표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퀘이커는 두 종류로 나뉘게 되는데, 하나는 복음주의적 퀘이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이다.
주로 Joseph John Gurney(1788~1847)의 영향 하에서 나타난 복음주의적 퀘이커는 성경의 무오성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으며, 그것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계속적인 계시와 철저한 평화주의(doctrinal pacifism), 그리고 내면의 빛을 통한 구속과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퀘이커들은 목사를 임직시키지는 않지만, 목사를 청빙하기는 한다. 또한 순서를 따라 드리는 예배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복음주의적 퀘이커의 표준적 진술은 ‘리치몬드 선언’(1887)이다.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주의는 부분적으로는 18세기 정적주의적 퀘이커 사상(quietist Quakerism)에서 연원한 것으로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을 결합시킨 사상이다. 보편적 내면의 빛 교리를 확장시켜 모든 종교에 그 빛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며 모든 종교들은 다 조화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류는 다 하나라고 믿기에 이런 분파의 퀘이커는 평화 운동과 사회봉사 활동에서 매우 활동적이다.”
넷째, 퀘이커교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가지 종자가 있다고 믿는다. 이는 죄의 종자와 신적 종자다. 죄의 종자는 인간 자신으로부터 싹이 트나, 신적 종자는 신으로부터의 개입이 필요하다. 이것을 ‘하나님의 심방’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심방의 하루 또는 한 때를 주어 그가 구원을 얻어 그리스도의 죽음의 열매에 동참하게 한다. 이 하나님의 심방의 때를 가지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마음속에 비치는 빛에 항거하는 사람은 멸망받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은 아직 미완성이다.
또, 퀘이커에 의하면 사람에게는 아담의 죄값이 전가되어 있지 않다. 사람이 다 같은 불복종의 죄를 범하고부터 비로소 죄책이 생기게 된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까지 원죄의 책임을 지우는 교리는 잔인하고 자연과 하나님의 자비와 의에 어긋나는 견해다.
이승구 교수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이 아담의 죄의 전가를 거부하는 퀘이커교는 결국 펠라기우스적인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고, 그 구원의 방도는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가의 여부가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섯째, 퀘이커교의 교회는 ‘거룩한 빛,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순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구성한다. 그 안에는 이미 죽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교도(異敎徒)와 터키 사람과 유대 사람도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 눈을 뜨고 은혜의 선물의 정도에 따라 서로 가르치고 교육하고 배려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런데 외적 신앙고백과 외적 의식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있다면(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지목) 그들은 악마의 꼬임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퀘이커교의 주장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초기 퀘이커 사상가인 죠지 폭스는 가시적 교회의 배교가 신약 성경에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며 배교한 교회에 천주교회와 개신교 모두를 넣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이제 ‘참 교회’를 모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했다. 그 함의는 이제 내면의 빛을 추구하는 이들이 참 교회라는 것이고, 자신들과 이교도 가운데서 이 내면의 빛에 순종하는 이들은 모두 참 교회에 포함된다는 주장이다. 후에 현대 비복음주의적 퀘이커에서는 이런 생각이 더 확대되어 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섯째, 퀘이커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평화주의자이다. 따라서 퀘이커교가 병역과 선서를 거절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봉사적 사랑으로써 적극적으로 가담한다. 이 점이 다른 기독교신비주의자들과 다른 점이다.
3. 퀘이커교의 한국 전래와 현황
처음 퀘이커가 한국에 전해진 것은 6.25전쟁 직후다. 1953년 전북 군산의 도립병원에서 구제활동을 폈던 미국과 영국의 퀘이커 의사들을 통해 처음 퀘이커를 접한 군산 사람들이 그들의 침묵예배에 참석하면서 한국 퀘이커가 탄생했다. 퀘이커 봉사자들이 떠난 이후에도 한국인들끼리 자체 모임을 계속해 한국 퀘이커 1세대가 출현했으며 최초의 한국인 퀘이커는 이윤구였다.
1960년대 ‘사람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 세상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이루는 일에 힘이 모아져야 한다는 데 공감한 함석헌의 가담으로 퀘이커는 한때 크게 부흥했다. 함석헌은 본래 장로교 신자였으나 일본에 건너가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자가 되었다가 사회에 대한 그들의 소극적 신앙태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퀘이커교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퀘이커 지도자였던 브린튼의 영향을 직접 받아 그것을 생활화하는 가운데 한국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퀘이커교는 1989년 함석헌 타계 후 내부 혼란과 갈등을 빚으며 10년이 넘도록 예배모임조차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미국 펜들힐에서 정식 퀘이커교도가 되어 귀국한 이후 한국퀘이커에도 활기가 생겼다. 옛 퀘이커 멤버들을 중심으로 원상 복귀를 위해 노력해 다시 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현재 서울 신촌의 모임에는 약 50여명의 교도들이 있고, 곧 대전에 모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박성준 교수는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는 글을 통해 퀘이커교와 민중신학의 연합을 시도한다. 그는 죠지 폭스는 ‘예수가 이미 재림한 사실을 알리려 했던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죠지 폭스는 거듭 거듭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을 몸소 가르치시기 위해 오셨다(Jesus Christ is come to teach his people himself)’라고 외쳤다. 이것은 두말할 여지도 없이 ‘the Second Coming of Christ’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하시 하처에 육신적으로 재림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민중의 마음속에 이미 ‘내면의 빛’, ‘씨앗’,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음으로 이미 ‘그리스도’가 와 계신다는 것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박 교수는 계속해서 “죠지 폭스의 새 진리를 따라 새 사람으로 변화된 수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 그리스도가 그 시대와 사회의 불의와 폭력에 도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며 “그러므로 내면의 빛과 씨앗, 영을 통한 그리스도의 재림이란 단지 사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닌, 변화된 남녀들이 새 삶의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때, 밖으로 사회와 역사 속으로 나아가는 종말론적 운동을 뜻했다”고 해석한다.
이승구 교수는 박성준 교수의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결국 그리스도의 가시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다”며,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고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강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갈 2:20), 바울을 따라 우리가 이렇게 말할 때에도 바울은 그리스도 자신과 성도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인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했으며, 우리는 그 점을 매우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우리들의 성령님의 은혜 아래서의 삶과 사역의 질적인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결국 그리스도 사역의 독특성을 파괴하게 된다”며 “우리 안에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그리스도의 재림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반(反)하는 것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문자적, 신체적, 인격적 재림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또 “함석헌은 1970년대 초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씨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전개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지만, 그의 씨알 사상의 핵심 내용은 퀘이커 사상과 흡사하다”며 “민중신학의 창시자 격인 서남동과 안병무에게 미친 씨알 사상의 영향을 생각할 때, 민중신학과 퀘이커 사상의 만남은 일찍이 이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이승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함석헌 선생님은 무교회주의사상과도 오랫동안 관련을 갖고 계셨고, 1970년대에 퀘이커 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항상 종교적으로 자기 나름의 길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퀘이커 사상을 항상 변해 가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는다면 그를 충실한 퀘이커라고 하기는 어렵다. ‘씨알’ 사상은 퀘이커 사상 보다 더 오래 전부터 영글어진 것이 분명하며, 퀘이커 사상과 민중 신학을 연관시키는 것은 흥미롭기는 하나(따라서 학자들이 그런 논구를 할 수는 있으나) 그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 참고도서 -----
김나미, <이름이 다른 그들의 신을 말하다>, 2005
김남식, <일제하 한국교회 소종파 운동 연구>, 새순출판사, 1987
김성봉, <빈야드 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와신앙, 1996
김영태, <신비주의와 퀘이커 공동체>, 인간사랑, 2002
이종성, <교회론(1)>, 대한기독교출판사, 1989
함석헌, <현대의 禪과 퀘이커 신앙>, 삼민사, 1985
박성준, “21세기의 문턱에서 민중신학을 다시 생각한다”, <신학사상>109집, 2000
<브리테니커 대백과사전>, 2002
직접 계시 중시, 교회 조직 거부 "이단성"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보는 퀘이커교
퀘이커교의 이 같은 예배 형태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개신교 신학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노선”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성서대학교의 이호우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주관적인 성령의 계시, 임재, 조명을 부르짖다가 교회조직과 성경해석, 성경연구, 심지어 일반적 예배조차 거부한다”며 “이것은 최근 범종교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영성수련과 일맥상통한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성령의 빛 또는 내적 조명을 강조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영성을 계발하고 신(하나님)과의 체험을 이룬다는 측면은 최근 동양철학적인 명상이나 마음 수련 즉, 뉴에이지 운동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개인적인 성령의 조명하심도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나 교회 공동체에게 임하는 해석적인 측면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신대대학원 최덕성 교수(역사신학)는 “퀘이커교도들에 대한 논의에서 가장 부각되어야 할 것은 신앙의 외형성(externality)에 대한 부정과 내면성(internality)에 대한 집착”이라며 “서양인의 사고양식인 플라톤주의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서 영국교회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이 외형적인 요소들, 교회라고 하는 조직(헌법, 규례 등), 성찬이라고 하는 물질요소들, 교리나 신학이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규범들을 거부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규정지었다.
특히 최 교수는 “부패한 지상교회의 조직이 가진 모순과 횡포를 고려하면 이들의 주장이 이해는 된다”고 전제하고 “하지만, 우리가 연약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점에서 외형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으며 무엇보다 성경이 외형적 요소들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최 교수는 “로마가톨릭처럼 외적 요소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는 퀘이커교도들의 주장은 합리적인 면에서나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도, 그리고 ‘역사적 교회’라는 것을 검토해 볼 때도 호소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성서대대학원장 김호식 교수(조직신학)는 “퀘이커는 경험주의적인 신앙노선에서 성경보다 자기들이 직접 받은 계시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이단이라고 취급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개신교는 66권 성경이 모든 신앙의 궁극적인 기준이라고 믿는다”면서 “퀘이커는 계시의 현장성을 믿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성경과 대등한 종류의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성경의 정경성을 부인하는 면에서 이단이라고 분류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또 “퀘이커는 성령을 받으면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신체 구조상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 빈야드와 오순절 운동과 같은 계열의 ‘성령운동자들’이다”라고 평가절하했다.
김 교수는 특히 “인본주의 신학 즉, 자신들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경험을 기준으로 이론을 전개하는 미국이나 남미의 ‘해방신학’이 한국에서 ‘민중신학’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며 “퀘이커교 운동이 현대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퀘이커는 평화주의자’라는 인식에 대해 “평화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적국이 침략해 올 때 방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평화주의는 문제 있다”고 비판했다.
불법에 침묵할 수 없는 성도
복음과 희망(www.gospel-hope )에 "이민성도" 라는필명으로 올린 글 내용이 좋아서,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필자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분으로 미주교회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쳤는 바 오늘날의 한국교회 실상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어느 평신도의 외침"이라고 판단하여 연재합니다. .(운영자)
천주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관상기도, 침묵기도에 대한 훈련을 해왔고, 최근 개신교에서도 침묵기도운동의 일종인 레노바레(renovare 새롭게 한다의 뜻) 운동이 미국과 한국에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확산되고 있다.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민중신학과 개인구원중심의 복음주의와 은사중심의 오순절운동의 맛을 보아온 한국교인들에게 있어서 이제 조금 입을 다물자는“침묵기도운동” 은 영성훈련으로서 소리없이 확산될 것이다.
미국에서의 침묵기도운동(레노바레)은 1990년 대초부터 퀘이커교의 강한 영향을 받은 영성학자로 알려진 리처드포스터목사(교수)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도되었고 그의 저서들은(리처드포스트의 기도) 한국어로도 번역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것도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주로 복음주의 진영의 목회자들이 레노바레운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처드포스트목사가 시작한“이제 하나님 앞에 말 좀 그만하고 침묵을 좀 하자”라는 레노바레운동은 시기적으로 개신교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과 동기가 있었다. 1990년대초의 미국은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TV전도자들”이 넘쳤던 시대였다.
예를 들면 오순절계통의 지미스와커트목사는 오순절목사 답지 않게 근본주의적인 설교자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TV설교는 골든타임에 방영되었고 100개국이상에 송출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그는 동성연애, 낙태, 이혼, 술과 담배와 음행과 마약에 대하여 근본주의적인 멧세지를 강하게 전하였으며 세속적인 논쟁거리를 교인들에게 허용하거나 또는 그런 행위를 하는 목회자들의 뒷조사를 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는 등 당시에 무기력한 교회를 떠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미스와커트재단에 헌금을 보내는 등 대단한 환호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지미스와커트목사가 매춘부와 상습적으로 놀아났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강하게 부정하였지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잡혀 결국 역동적으로만 보였던 모든 사역을 전부 접게 되었다.
한편, 당시에 지미스와커트목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유명한 TV전도자였던 짐 베이커목사도 다른 여자와 간통하였던 일이 드러났고 놀라운 것은 목사부인이었던 그 아내도 다른 남자와 간통하는 일까지 알려져 베이커목사 역시 언론과 수많은 입방아에게 망신을 당한 후 모든 사역을 접게 되었다.
미국이 어느 정도로 도덕이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었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1995-1997년에 벌어졌는데 클린턴 전 대통령과 인턴직원 르윈스키가 백악관내에서 가진 성적관계문제를 기억할 것이다.
클린턴 전대통령은 초라한 표정으로 TV생방송 중계 하에서 자신의 불미스러운 관계를 특별검사들 앞에서 자백(?)하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언론들은 무한대의 언론의 자유를 가지고 대통령의 과거를 샅샅이 들추면서 대통령의 아랫도리 사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보도되어 미국에 세계에 망신을 당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90년대는 구소련과 동유럽의 공산독재가 완전히 무너지고 난 후 전 세계가 세계화라는 화두를 내걸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재편성되었던 시점인 동시에 정치가들이나 시민 사회 운동가들이 낙태, 동성연애, 종교간 대화, 환경보전, 인권문제를 내어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기간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1990년대 초부터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등장과 IT산업 등을 비롯한 기술과학의 측면에서 볼 때 1990년대 10년 동안 있었던 변화의 속도와 발전의 분량은 지난 20세기 동안의 속도와 양보다 훨씬 많았다고 평가하는 분석가들도 있다. 김정일이 중국을 오랜만에 방문하고서는 “천지개벽” 이 일어났다고 표현한 것도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으로 의기양양하였고, 팩스로마와 같은 미국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었으며, TV전도자들이 대규모 안방을 점령하고서 떠들고 있었던 그러한 1990년대에 등장하였던 것이 바로 미국발 영성운동의 하나인“침묵기도운동-레노바레운동” 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에 등장한“침묵기도운동-레노바레운동”은 어떻게 보면 미국적인 상황과 가치관에서 볼 때는 필연적인 운동인지 모른다. 한마디로 세계를 상대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해보고 모든 것을 이루었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바로 성취감 뒤에 오는 “공허감”또는 “상실감” 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발“침묵기도-레노바레운동”은 21세기를 맞이한 한국 내에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물량주의와 세속화로 만신창이 되어 있는 교회로서는 새로운 희망운동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앞으로 제자훈련이나 영성훈련과 같은 모습으로 한국교회 내에 계속 확산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내에 침투하는 "침묵기도운동의 의도성과 방향성" 에 대해서 나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과거에 제자훈련프로그램이 사람을 부르고 세워서 파송하는 기본을 잃어버리고 개교회를 성장시키고 대형화 시키는 하나의 도구나 일종의 계급장으로 악용되어 작은 교회들은 더 작은 교회로 큰 교회는 더 큰 교회로 만드는 기괴한 일이 있었던 것과 똑 같이 “침묵기도-레노바레운동”이 대형화나 물량주의를 치닫고 있는 중대형교회들의 목회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교인들의 입을 교묘하게 틀어 막는 "세련된 종교도구"나 자신들에 대한 "비판의 방패"로 전락되거나 악용되지 않을까라고 심히 우려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부자의 세습과 독재와 우상숭배를 교묘하게 가리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학습시간에 "가정에서 어버이를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습관을 어릴 때부터 길러주어야 한다."는 때 아닌 "공자의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각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은 일주일에 적어도 5회 이상(주일1,2부예배,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혼자서 실컷 떠들고 혼자서 자기 주장만 실컷 해놓고서, 그나마 나눌 수 있는 교회인터넷도 일방적인 교회홍보용으로 전락시켜 놓고 있는데 갑자기 교인들을 대단히 신앙적으로 보이게 하고, 교인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레노바레운동”은 그야말로 물량주의와 성장지상주의를 걸어왔던 중대형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침묵은 금이다 운동" 으로 너무나 신나는 운동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 혼자 강단이나 기회가 주어지는 모든 시간에 “원맨쇼”를 벌이면서 실컷 떠들어 놓고서는 이제 와서 교회가 수많은 문제에 봉착되자 기가 막히게“침묵영성운동”을 들고 나와서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 한국교회회복의 대안이나 되는 것처럼 씨부렁거리는 것은 지독하게 염치가 없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일수록 목회자 혼자서 원맨쇼 하고 교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열심히 헌금이나 내고 열심히 들어 주고 “침묵”하는 교인만이 바로“축복받을 교인, 믿음 좋은 교인”으로 인식시켜 왔던 곳이 한국교회가 아니었던가?
교인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말이 많았는가?” 말이 많고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은 교인들이 아니고 “말이 많은 목회자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침묵해왔던 교인들에게 말많았던 목회자들이“침묵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훈련의 단계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다.
한국민들은 “침묵운동”에 도를 턴 “침묵의 도사들” 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인들이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면 과연 한국의 중대형교회나 이민교회의 목회자들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 민중들은 조선 500년, 일제식민지통치, 그리고 해방 후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항상“침묵”을 강요 받았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들이 사회에서 평안히 살아가는 중요한 덕목으로“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말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해라” 는 것이었다. 지금 북한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교회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 노선을 걸을수록 이상하게도 담임목회자들은“신본주의” 를 내걸고서 일방적으로 마이크를 잡고서 평생을 혼자서 말하고 교인들에게 “자신에 대한 맹종과 침묵”이 최고의 신앙수준을 가진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세뇌시켜 왔던 것이다.
이런 교인들의“맹종과 침묵” 의 부작용들이 바로 “세습과 횡령과 배임과 음란과 목사우상과 독재” 목회자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목회자가 불륜하고, 횡령하고, 독재하고 불법을 행하는 것을 두 눈 뜬 채 듣고 보는데도, 교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독재와 권위주의적인 사회와 교회에서 바른 말했다가는 “찍히고, 망신당하고,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 는 이유로 인하여 소리 없는 “침묵의 강요” 속에서 살아왔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도 못하고 쥐죽은 듯이 살고 있는 북한주민들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있었던 실제적인 모습들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독재와 귄위주의 정권의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민중이 “침묵”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었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한 가지는 “입 다물고 시키는대로 하라는 언론통제” 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남산(구 중앙정보부의 취조실) 에 데리고 가서 겁 주는 것” 이었다.
입을 다물지 않으면 어느 날 붙잡혀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멍도 없이 얻어 맞거나 죽을지 모른다는 이 공포심은 정말 대단하였다. 그런데 “입다물고 시키는대로 하고 말 듣지 않으면 벌 받을지 모른다” 는 요즈음의 중대형교회의 모습과 대단히 유사하지 않는가?
지금 한국에서는 진보적인 정치가들이나 시민운동가들의 언행 때문에 많은 우려를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과거 독재 정권하에서 극심한 피해를 당하였던 사람들의 일시적인 반작용, 즉 심한 부작용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갑자기 “자기의 생각(사상의 자유)을 표현하였다” 는 이유로 끌려가 몰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사회에서 평생 불이익을 당하였는데 거기에 반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감옥살이 하였던 상처와 분노와 복수심이 그냥 기괴한 언행들이 바로 “양극화 현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각종 양극화 현상들은 한국내 좌파들 또는 북한공산집단의 책동이라기 보다는 전부 “기득권세력들의 자업자득” 이며 지난 세월 동안 기득권세력들에게 억울하게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의 “심각한 역작용 또는 부작용” 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의 목회자들, 특히 중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자기들이 바로“역작용과 부작용”의 공범이었던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좌파와 빨갱이들은 대형교회를 싫어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대단히 무식하고 무지하며 거만한 태도로 “툭하면 구국기도회라는 이름으로 궐기대회”를 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적어도 북한 공산집단이나 빨갱이들을 비판하려고 한다면 “자기들부터 교회 안에서 독재하지 말고, 자기들부터 불륜하거나 횡령하거나 세습하지 말고, 자기들부터 돼지처럼 배터지게 먹고 비싼차와 비싼 집에 사는 특권계급이 되지 말고, 자기들부터 교회내 인터넷과 같은 언론을 통제하지 말고, 자기들부터 세습과 같은 짓을 하지 말아야 참된 말빨이 서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마치 북한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선전용 대형 건물을 짓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오직 대형교회건물 짓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과 사명으로 알고서 민초들인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내어서 거대한 건물 안에서 왕 노릇이나 독재나 하고 일산불란하게 조직화 하여 결국 세습이나 하는 자들이 어떻게“좌파와 빨갱이들은 나쁜 놈들” 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면 말할수록 “나는 대단히 사악한 기득권세력” 라고 자백하고 확인시켜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언제 그런 식으로 “좌파와 빨갱이들은 나쁜 놈”이라는 식의 정치발언을 하라고 하셨는가? 왕 같은 자리에 앉아서 호의호식하면서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었던 종교지도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심한 책망을 받았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공산당보다 더 독재하고 더 비도덕적이고 더 나쁜 짓을 하면서 “좌파와 빨갱이들이 대형교회를 싫어한다”고 예배시간에 떠든다면 지나가는 소나 나귀도 웃을 일이며 한마디로 “엽기적인 쇼”에 불과한 것이며, 타락한 행태들이 도리어 좌파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목적을 열심히 돕는다는 역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평생을 “멸공보다 더 차원을 높힌다는 승공운동”을 해왔다고 하는 통일교주가 북한에 한번 다녀오더니만 홀까닥 하고 바뀌어진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침묵의 영성을 주창해온 리처드포스트목사의 “레노바레운동”은 이론이나 테크닉이 아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삶의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포스트식의“레노바레운동”을 주도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단에서 열심히 말을 많이 해왔던 “말쟁이” 들로 “침묵의 영성” 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리처드포스트목사와 같은 목회나 삶을 한번도 살았던 적이 없으면서 교회의 불법과 불의에 침묵하면서 교인들에게 “침묵의 기도-레노바레운동”을 하는 한국의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또 다른 형태의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 본인들은 평생을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해놓고 이제 교인들이 인터넷 시대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맞이 하여 교인들이 한 마디라고 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교회인터넷을 기업과 같이 자기 선전이나 홍보용으로 만들어 놓고서 자유게시판이나 나눔의 공간은 아예 실명제니 회원제니 하는 세속적인 아이디어를 총동원하여 교인들의 입을 틀어막고서, 독재시대와 같은 또 다른 형태의 교묘한 “침묵”을 강요하는 이 시대가 되어 있다.
교회는 세속화와 물량주의로 타락하고 있는데 거기에 반발하는 교인들이 양심선언을 하고 있는데 그런 양심의 고백을 담임목회자가 전혀 수용을 해 주지 못하니까, 교회밖으로 튀어나가 각종 기독교 안티사이트들이 우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까발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입 좀 다물고 침묵하자” 고 침묵의 영성운동을 벌이는 말쟁이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있으니 정말 놀랄 일이다.
세칭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의 탈을 쓰고서 물량주의를 걷고 있는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목회스타일은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과 그렇게도 닮았는지 놀랄 때가 너무나 많다.
극과 극이 만나면 통한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이다. 여기서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회의 규모에 관계없이 (소형 교회이든, 중형교회이든, 대형교회이든), 복음증거와 선교와 이웃의 구제에는 관심에 없고 오직 교회 건물을 짓고서, 작은 교회로부터 수평이동이라도 시켜서 교인들을 끌어 모아 목회성공에 미쳐 있는 목회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과 독재하면서 물량주의와 성장지상주의로 나아가는 목회자들과 얼마나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건물을 폐쇠하고, 목회자들을 없애고, 신학교를 없애면 하나님이 없어지거나, 그리스도교는 사라진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회건물이 판자집이나 되고, 담임목사가 없어지고, 신학교가 없어지면,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지거나 그리스도교가 무너진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궁전과 같은 거대한 건물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의 위대성광 우수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민들은 굶어 죽는데도 상징적인 건물들을 엄청나게 지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회건물 속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속이고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곧 거대한 교회건물건축이라고 세뇌시킨 후, 교인들이야 어떻게 살든, 빚지고 굶어 죽든 호주머니를 털어서 수천억 수백억의 건물을 지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알기 쉽게 북한체재) 수령만이 유일한 지도자이며, 무오류하고, 맹종하는 공산당간부만이 수령의 유일한 형제들이며, 충성스러운 공산당원들만이 수령의 자식들이라고 믿고 있으며 인민들은 오직 수령과 공산당간부와 당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절대 복종을 하여야 하고, 고난이 올 때는 총폭탄이 되어서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담임목사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무오류한 위임통치대리자이고, 맹종하는 당회원들만이 담임목사의 유일한 동역자들이며, 맹종하는 제직회원들만이 담임목사의 진정한 영의 자식들이며, 교인들은 오직 담임목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고, 특히 담임목사에게 절대 복종을 하여야 하고, 담임목사가 고난이 올 때는 모든 교인들은 “총폭탄”이 되어서 목숨까지 걸고 방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인민의 입과 언론을 통제하여, 오직 수령의 일방적인 교시대로 움직이는 것이 인민의 영광과 축복이라고 세뇌를 시키고 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입과 교회내 언론을 통제하고, 오직 담임목회자의 일방적인 가르침대로 움직이는 것이 교인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되는 것으로 세뇌를 시키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수령의 교시에 어긋나는 반동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방해꾼으로 지정하고서 바로 반동으로 처단한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목회자의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교인들을 교회성장의 방해꾼으로 지정하고 바로 마귀새끼들이라고 지목한다.
오늘날 근본주의, 복음주의, 보수주의의 탈을 쓰고 있는 교회와 담임목회자일수록 교회내 언론이 통제되어 교인들에게 교묘한 “침묵”강요하고, 교회건물을 짓는 것이 대단한 헌신과 업적이며, 담임목사에 반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라는 식의“교묘한 암시”로 지속적인 세뇌를 시켜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세뇌의 결과” 가 아니고는 어떻게 불륜하고, 횡령하고 배임한 타락한 목회자를 여전히 감싸고 “우~리 목사님”하면서 교회를 다닐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아내 아닌 여자 앞에서 바지를 함부로 내리고 몸부림치는 인간을“우~리목사님” 하는 맹신족들이 이 사회의 지천에 깔려 있으니 다섯명에 한 명이 개신교인들이라고 하는데 사회는 더 음란해지며, 더 부패해지는 것이다.
목사도 불륜해도 끄떡 하지도 않는데 평신도인 나는 불륜해도 문제가 없겠지 하는 공범의식이 있으니 세계 3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이혼률이 높으며, 고아들이 보육원에 차고 넘치고, 1년에 2천 500명 이상의 고아들이 해외에 입양되어지며, 수도권만 하여도 70만명 이상의 매춘여성들이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태연히 불법을 행하고, 부도덕하여도 교인들이 오로지 “총폭탄” 이 되어서 그런 타락한 목회자를“침묵”으로 비호 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는 이 집단정신질환적인 억제심리와 행동이 바로 교회는 물론이고 사회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교회들은 왜 인정하지 않는가? 불법과 불의와 천인공노할 비도덕을 보고도“침묵” 이라는 형태로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은 “세뇌” 외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무신론공산주의자들에게 인민들이 세뇌 당하는 그 수법” 과 똑 같은 방식으로 교인들도 혹세무민 속에서 오랫동안 철저하게 “세뇌”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이 타락하고, 갱신의 가망성이 미약한 이유는 타락한 목회자들과 직분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러한 타락한 자들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도록 세뇌된 “침묵”이 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타락한 목회자로부터 은혜를 받겠다고 자리를 채워주면서 기계적으로 “아멘” 하는 교인들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교인들의 “침묵” 의 주소를 찾아가면 “깊은 영성”이나 “예수님의 마음” 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한국교인들의 “침묵”은 “말하면 죽는다”는 조선 500년 봉건주의사회로부터 피 속에 흐르는“일단 살고 보자는 생존본능”과, 말하면 일본도에 목이 날아간다는 일제시대의 “비열한 생존본능”과, 바른 말하면 남산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독재정권하에서 겪었던 “공포심 속에서 잘 먹기만 하면 되지 뭐, 조용히 살자” 하는 “기복적인 돼지본능”이 믹서가 되어 “침묵”이 골수에 박혀 버렸으며, 무한한 언론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본능적으로 “세뇌되고 강요된 침묵”이 교회 안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민교회의 상당수는 엄청난 불법 속에 휩싸여 있다. 교회이름으로 가짜 교직원, 가짜 전도사, 가짜 목사의 재직증명서를 발행하여 종교비자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담임목회자-당회서기-재정부장이라는 삼각동맹 속에서 수천달러에서 수만달러를 받아먹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선교나 중국선교나 제3세계의 선교를 한다는 명목으로 영수증 없는 선교비를 교회나 개인들로부터 챙겨서 선교여행하는 척하면서 인마이포켓하는 골빈목회자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담임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받는 사례를 분산시켜 실제는 엄청난 혜택을 받으면서 안그런척 교인들에게 내숭을 떨고서는 뒷돈 또는 동정을 받는 "쇼맨쉽"도 대단하다.
그런데 연말감사 또는 공동의회에서 불의가 전부 드러나는데도 교인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침묵하도록 길들여져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특히 이민교회는 수평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교회 속에 만연하는 불법들에 대하여 교인들이 관여하기를 원치 않는다.
한마디로 그냥 이민의 삶에 지쳐서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종교생활이나 하고 사람들 만나서 키득꺼리는 친목회나 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민교회는 갈등하는 본국교회보다 훨씬 더 썩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침묵하는가? 그 뿌리 속에 길들여짐의 흔적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나는 왜 침묵할 수밖에 없는가? 그 뿌리 속에 어떤 녀석이 들어 앉아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나는 왜 침묵이 상습화 되어 있는가? 그 뿌리 속에 어떻게 세뇌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두려움 속에서 불법과 불의에 침묵하도록 철저하게 세뇌되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살아가는 그 모습이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며 “참영성” 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하셨는가? 외쳐야 할 때는 외치셨으며, 꾸짖어야 할 때는 꾸짖으셨고, 탄식해야 할 때는 탄식하셨고, 부르짖어야 할 때는 부르짖었으며, 울어야 할 때는 울었고,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하셨으며, 아파해야 할 때는 아파하셨으며, 울부짖어야 할 때는 울부짖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 외쳐야 할 때는 뒤로 궁시렁거리고, 꾸짖어야 할 때는 아부하고, 탄식해야 할 때는 씩씩거리고, 부르짖어야 할 때는 내 배만 채워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울어야 할 때는 웃어버리고, 침묵해야 할 때는 변명하고, 아파해야 할 때는 낄낄거리며, 울부짖어야 할 때는 입다물어 버리는 상태는 아닌가?
지난 10년 동안 왜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타종교는 전부 성장하였는데 개신교회 만큼은 왜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는가?
그 진짜 이유는 "지속적인 세뇌와 침묵의 반강요" 속에서 복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 죄를 꾸짖는 그리스도인, 이 땅의 죄악들을 보고서 탄식하는 그리스도인, 주님의 나라와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르짖는 그리스도인, 죄를 붙잡고서 애통하는 그리스도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따라가는 침묵하는 그리스도인,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인, 죄를 회개치 않으면 망할지 모른다는 절박감으로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하여 울부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복음과 희망(www.gospel-hope )에 "이민성도" 라는필명으로 올린 글 내용이 좋아서, 필자의 허락을 받아 전재합니다.
필자는 미주교회에서 전문직업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분으로 미주교회들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쳤는 바 오늘날의 한국교회 실상에서 대단히 유익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어느 평신도의 외침"이라고 판단하여 연재합니다. .(운영자)
천주교에서는 전통적으로 관상기도, 침묵기도에 대한 훈련을 해왔고, 최근 개신교에서도 침묵기도운동의 일종인 레노바레(renovare 새롭게 한다의 뜻) 운동이 미국과 한국에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확산되고 있다.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민중신학과 개인구원중심의 복음주의와 은사중심의 오순절운동의 맛을 보아온 한국교인들에게 있어서 이제 조금 입을 다물자는“침묵기도운동” 은 영성훈련으로서 소리없이 확산될 것이다.
미국에서의 침묵기도운동(레노바레)은 1990년 대초부터 퀘이커교의 강한 영향을 받은 영성학자로 알려진 리처드포스터목사(교수)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시도되었고 그의 저서들은(리처드포스트의 기도) 한국어로도 번역되어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있는 것도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주로 복음주의 진영의 목회자들이 레노바레운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처드포스트목사가 시작한“이제 하나님 앞에 말 좀 그만하고 침묵을 좀 하자”라는 레노바레운동은 시기적으로 개신교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과 동기가 있었다. 1990년대초의 미국은 “말도 많고 문제도 많았던 TV전도자들”이 넘쳤던 시대였다.
예를 들면 오순절계통의 지미스와커트목사는 오순절목사 답지 않게 근본주의적인 설교자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TV설교는 골든타임에 방영되었고 100개국이상에 송출될 정도로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그는 동성연애, 낙태, 이혼, 술과 담배와 음행과 마약에 대하여 근본주의적인 멧세지를 강하게 전하였으며 세속적인 논쟁거리를 교인들에게 허용하거나 또는 그런 행위를 하는 목회자들의 뒷조사를 해야 한다는 설교를 하는 등 당시에 무기력한 교회를 떠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지미스와커트재단에 헌금을 보내는 등 대단한 환호가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지미스와커트목사가 매춘부와 상습적으로 놀아났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강하게 부정하였지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잡혀 결국 역동적으로만 보였던 모든 사역을 전부 접게 되었다.
한편, 당시에 지미스와커트목사와 쌍벽을 이루었던 유명한 TV전도자였던 짐 베이커목사도 다른 여자와 간통하였던 일이 드러났고 놀라운 것은 목사부인이었던 그 아내도 다른 남자와 간통하는 일까지 알려져 베이커목사 역시 언론과 수많은 입방아에게 망신을 당한 후 모든 사역을 접게 되었다.
미국이 어느 정도로 도덕이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었던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1995-1997년에 벌어졌는데 클린턴 전 대통령과 인턴직원 르윈스키가 백악관내에서 가진 성적관계문제를 기억할 것이다.
클린턴 전대통령은 초라한 표정으로 TV생방송 중계 하에서 자신의 불미스러운 관계를 특별검사들 앞에서 자백(?)하는 일이 벌어졌다. 모든 언론들은 무한대의 언론의 자유를 가지고 대통령의 과거를 샅샅이 들추면서 대통령의 아랫도리 사건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보도되어 미국에 세계에 망신을 당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90년대는 구소련과 동유럽의 공산독재가 완전히 무너지고 난 후 전 세계가 세계화라는 화두를 내걸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재편성되었던 시점인 동시에 정치가들이나 시민 사회 운동가들이 낙태, 동성연애, 종교간 대화, 환경보전, 인권문제를 내어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던 기간이기도 하다.
이와 더불어 1990년대 초부터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등장과 IT산업 등을 비롯한 기술과학의 측면에서 볼 때 1990년대 10년 동안 있었던 변화의 속도와 발전의 분량은 지난 20세기 동안의 속도와 양보다 훨씬 많았다고 평가하는 분석가들도 있다. 김정일이 중국을 오랜만에 방문하고서는 “천지개벽” 이 일어났다고 표현한 것도 바로 그러한 시기였다.
미국은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으로 의기양양하였고, 팩스로마와 같은 미국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와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되었으며, TV전도자들이 대규모 안방을 점령하고서 떠들고 있었던 그러한 1990년대에 등장하였던 것이 바로 미국발 영성운동의 하나인“침묵기도운동-레노바레운동” 이었다는 것을 우리들은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에 등장한“침묵기도운동-레노바레운동”은 어떻게 보면 미국적인 상황과 가치관에서 볼 때는 필연적인 운동인지 모른다. 한마디로 세계를 상대로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해보고 모든 것을 이루었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가슴에 다가오는 것은 바로 성취감 뒤에 오는 “공허감”또는 “상실감” 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발“침묵기도-레노바레운동”은 21세기를 맞이한 한국 내에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물량주의와 세속화로 만신창이 되어 있는 교회로서는 새로운 희망운동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앞으로 제자훈련이나 영성훈련과 같은 모습으로 한국교회 내에 계속 확산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내에 침투하는 "침묵기도운동의 의도성과 방향성" 에 대해서 나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과거에 제자훈련프로그램이 사람을 부르고 세워서 파송하는 기본을 잃어버리고 개교회를 성장시키고 대형화 시키는 하나의 도구나 일종의 계급장으로 악용되어 작은 교회들은 더 작은 교회로 큰 교회는 더 큰 교회로 만드는 기괴한 일이 있었던 것과 똑 같이 “침묵기도-레노바레운동”이 대형화나 물량주의를 치닫고 있는 중대형교회들의 목회자들이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교인들의 입을 교묘하게 틀어 막는 "세련된 종교도구"나 자신들에 대한 "비판의 방패"로 전락되거나 악용되지 않을까라고 심히 우려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부자의 세습과 독재와 우상숭배를 교묘하게 가리는 작업의 일환으로서 학습시간에 "가정에서 어버이를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습관을 어릴 때부터 길러주어야 한다."는 때 아닌 "공자의 가르침"을 새삼스럽게 강조하고 있다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각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은 일주일에 적어도 5회 이상(주일1,2부예배, 새벽기도회,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혼자서 실컷 떠들고 혼자서 자기 주장만 실컷 해놓고서, 그나마 나눌 수 있는 교회인터넷도 일방적인 교회홍보용으로 전락시켜 놓고 있는데 갑자기 교인들을 대단히 신앙적으로 보이게 하고, 교인들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는 “레노바레운동”은 그야말로 물량주의와 성장지상주의를 걸어왔던 중대형교회의 목회자들에게는 "침묵은 금이다 운동" 으로 너무나 신나는 운동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기 혼자 강단이나 기회가 주어지는 모든 시간에 “원맨쇼”를 벌이면서 실컷 떠들어 놓고서는 이제 와서 교회가 수많은 문제에 봉착되자 기가 막히게“침묵영성운동”을 들고 나와서 교인들에게 가르치면서 한국교회회복의 대안이나 되는 것처럼 씨부렁거리는 것은 지독하게 염치가 없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일수록 목회자 혼자서 원맨쇼 하고 교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열심히 헌금이나 내고 열심히 들어 주고 “침묵”하는 교인만이 바로“축복받을 교인, 믿음 좋은 교인”으로 인식시켜 왔던 곳이 한국교회가 아니었던가?
교인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말이 많았는가?” 말이 많고 문제가 있었던 사람들은 교인들이 아니고 “말이 많은 목회자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침묵해왔던 교인들에게 말많았던 목회자들이“침묵의 영성”이 최고의 영성훈련의 단계인 것처럼 몰아가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다.
한국민들은 “침묵운동”에 도를 턴 “침묵의 도사들” 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인들이 침묵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면 과연 한국의 중대형교회나 이민교회의 목회자들 몇 명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국 민중들은 조선 500년, 일제식민지통치, 그리고 해방 후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항상“침묵”을 강요 받았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들이 사회에서 평안히 살아가는 중요한 덕목으로“함부로 주둥이 놀리지 말고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해라” 는 것이었다. 지금 북한이 바로 그런 모습이다.
교회가 보수적이고 복음주의 노선을 걸을수록 이상하게도 담임목회자들은“신본주의” 를 내걸고서 일방적으로 마이크를 잡고서 평생을 혼자서 말하고 교인들에게 “자신에 대한 맹종과 침묵”이 최고의 신앙수준을 가진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세뇌시켜 왔던 것이다.
이런 교인들의“맹종과 침묵” 의 부작용들이 바로 “세습과 횡령과 배임과 음란과 목사우상과 독재” 목회자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목회자가 불륜하고, 횡령하고, 독재하고 불법을 행하는 것을 두 눈 뜬 채 듣고 보는데도, 교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독재와 권위주의적인 사회와 교회에서 바른 말했다가는 “찍히고, 망신당하고, 피해를 당할지 모른다” 는 이유로 인하여 소리 없는 “침묵의 강요” 속에서 살아왔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도 못하고 쥐죽은 듯이 살고 있는 북한주민들을 보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에 있었던 실제적인 모습들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 독재와 귄위주의 정권의 권력자들이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민중이 “침묵”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들었던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한 가지는 “입 다물고 시키는대로 하라는 언론통제” 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남산(구 중앙정보부의 취조실) 에 데리고 가서 겁 주는 것” 이었다.
입을 다물지 않으면 어느 날 붙잡혀 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멍도 없이 얻어 맞거나 죽을지 모른다는 이 공포심은 정말 대단하였다. 그런데 “입다물고 시키는대로 하고 말 듣지 않으면 벌 받을지 모른다” 는 요즈음의 중대형교회의 모습과 대단히 유사하지 않는가?
지금 한국에서는 진보적인 정치가들이나 시민운동가들의 언행 때문에 많은 우려를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과거 독재 정권하에서 극심한 피해를 당하였던 사람들의 일시적인 반작용, 즉 심한 부작용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정상적인 사람이라도 갑자기 “자기의 생각(사상의 자유)을 표현하였다” 는 이유로 끌려가 몰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였으며, 사회에서 평생 불이익을 당하였는데 거기에 반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감옥살이 하였던 상처와 분노와 복수심이 그냥 기괴한 언행들이 바로 “양극화 현상”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각종 양극화 현상들은 한국내 좌파들 또는 북한공산집단의 책동이라기 보다는 전부 “기득권세력들의 자업자득” 이며 지난 세월 동안 기득권세력들에게 억울하게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의 “심각한 역작용 또는 부작용” 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보수적인 복음주의 교회의 목회자들, 특히 중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자기들이 바로“역작용과 부작용”의 공범이었던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 “좌파와 빨갱이들은 대형교회를 싫어한다”는 이분법적인 사고로 대단히 무식하고 무지하며 거만한 태도로 “툭하면 구국기도회라는 이름으로 궐기대회”를 하고 있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적어도 북한 공산집단이나 빨갱이들을 비판하려고 한다면 “자기들부터 교회 안에서 독재하지 말고, 자기들부터 불륜하거나 횡령하거나 세습하지 말고, 자기들부터 돼지처럼 배터지게 먹고 비싼차와 비싼 집에 사는 특권계급이 되지 말고, 자기들부터 교회내 인터넷과 같은 언론을 통제하지 말고, 자기들부터 세습과 같은 짓을 하지 말아야 참된 말빨이 서지 않는가라는 것이다.
마치 북한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선전용 대형 건물을 짓는 것과 비슷한 형태로 오직 대형교회건물 짓는 것이 살아가는 목적과 사명으로 알고서 민초들인 교인들의 호주머니를 털어내어서 거대한 건물 안에서 왕 노릇이나 독재나 하고 일산불란하게 조직화 하여 결국 세습이나 하는 자들이 어떻게“좌파와 빨갱이들은 나쁜 놈들” 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면 말할수록 “나는 대단히 사악한 기득권세력” 라고 자백하고 확인시켜 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언제 그런 식으로 “좌파와 빨갱이들은 나쁜 놈”이라는 식의 정치발언을 하라고 하셨는가? 왕 같은 자리에 앉아서 호의호식하면서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었던 종교지도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에게 심한 책망을 받았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공산당보다 더 독재하고 더 비도덕적이고 더 나쁜 짓을 하면서 “좌파와 빨갱이들이 대형교회를 싫어한다”고 예배시간에 떠든다면 지나가는 소나 나귀도 웃을 일이며 한마디로 “엽기적인 쇼”에 불과한 것이며, 타락한 행태들이 도리어 좌파나 공산주의자들의 활동목적을 열심히 돕는다는 역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평생을 “멸공보다 더 차원을 높힌다는 승공운동”을 해왔다고 하는 통일교주가 북한에 한번 다녀오더니만 홀까닥 하고 바뀌어진 사실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침묵의 영성을 주창해온 리처드포스트목사의 “레노바레운동”은 이론이나 테크닉이 아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삶의 열매인 것이다.
그런데 리처드포스트식의“레노바레운동”을 주도하는 한국의 목회자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강단에서 열심히 말을 많이 해왔던 “말쟁이” 들로 “침묵의 영성” 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리처드포스트목사와 같은 목회나 삶을 한번도 살았던 적이 없으면서 교회의 불법과 불의에 침묵하면서 교인들에게 “침묵의 기도-레노바레운동”을 하는 한국의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또 다른 형태의 위선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 본인들은 평생을 하고 싶은 말을 실컷 해놓고 이제 교인들이 인터넷 시대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시대를 맞이 하여 교인들이 한 마디라고 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이다.
그런데 목회자들은 교회인터넷을 기업과 같이 자기 선전이나 홍보용으로 만들어 놓고서 자유게시판이나 나눔의 공간은 아예 실명제니 회원제니 하는 세속적인 아이디어를 총동원하여 교인들의 입을 틀어막고서, 독재시대와 같은 또 다른 형태의 교묘한 “침묵”을 강요하는 이 시대가 되어 있다.
교회는 세속화와 물량주의로 타락하고 있는데 거기에 반발하는 교인들이 양심선언을 하고 있는데 그런 양심의 고백을 담임목회자가 전혀 수용을 해 주지 못하니까, 교회밖으로 튀어나가 각종 기독교 안티사이트들이 우죽순처럼 생겨나게 되었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까발려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제 입 좀 다물고 침묵하자” 고 침묵의 영성운동을 벌이는 말쟁이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있으니 정말 놀랄 일이다.
세칭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의 탈을 쓰고서 물량주의를 걷고 있는 목회자들이 가지고 있는 목회스타일은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무신론 공산주의자들과 그렇게도 닮았는지 놀랄 때가 너무나 많다.
극과 극이 만나면 통한다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이다. 여기서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회의 규모에 관계없이 (소형 교회이든, 중형교회이든, 대형교회이든), 복음증거와 선교와 이웃의 구제에는 관심에 없고 오직 교회 건물을 짓고서, 작은 교회로부터 수평이동이라도 시켜서 교인들을 끌어 모아 목회성공에 미쳐 있는 목회자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과 독재하면서 물량주의와 성장지상주의로 나아가는 목회자들과 얼마나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건물을 폐쇠하고, 목회자들을 없애고, 신학교를 없애면 하나님이 없어지거나, 그리스도교는 사라진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회건물이 판자집이나 되고, 담임목사가 없어지고, 신학교가 없어지면, 하나님의 임재가 없어지거나 그리스도교가 무너진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궁전과 같은 거대한 건물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공산주의의 위대성광 우수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민들은 굶어 죽는데도 상징적인 건물들을 엄청나게 지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회건물 속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속이고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곧 거대한 교회건물건축이라고 세뇌시킨 후, 교인들이야 어떻게 살든, 빚지고 굶어 죽든 호주머니를 털어서 수천억 수백억의 건물을 지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알기 쉽게 북한체재) 수령만이 유일한 지도자이며, 무오류하고, 맹종하는 공산당간부만이 수령의 유일한 형제들이며, 충성스러운 공산당원들만이 수령의 자식들이라고 믿고 있으며 인민들은 오직 수령과 공산당간부와 당원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절대 복종을 하여야 하고, 고난이 올 때는 총폭탄이 되어서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담임목사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무오류한 위임통치대리자이고, 맹종하는 당회원들만이 담임목사의 유일한 동역자들이며, 맹종하는 제직회원들만이 담임목사의 진정한 영의 자식들이며, 교인들은 오직 담임목사의 지시에 따라야 하고, 특히 담임목사에게 절대 복종을 하여야 하고, 담임목사가 고난이 올 때는 모든 교인들은 “총폭탄”이 되어서 목숨까지 걸고 방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하게 인민의 입과 언론을 통제하여, 오직 수령의 일방적인 교시대로 움직이는 것이 인민의 영광과 축복이라고 세뇌를 시키고 있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입과 교회내 언론을 통제하고, 오직 담임목회자의 일방적인 가르침대로 움직이는 것이 교인들에게 영광과 축복이 되는 것으로 세뇌를 시키고 있다.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수령의 교시에 어긋나는 반동들은 사회주의 건설에 방해꾼으로 지정하고서 바로 반동으로 처단한다.
>물량주의 목회자들은 목회자의 방침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교인들을 교회성장의 방해꾼으로 지정하고 바로 마귀새끼들이라고 지목한다.
오늘날 근본주의, 복음주의, 보수주의의 탈을 쓰고 있는 교회와 담임목회자일수록 교회내 언론이 통제되어 교인들에게 교묘한 “침묵”강요하고, 교회건물을 짓는 것이 대단한 헌신과 업적이며, 담임목사에 반항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라는 식의“교묘한 암시”로 지속적인 세뇌를 시켜왔던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세뇌의 결과” 가 아니고는 어떻게 불륜하고, 횡령하고 배임한 타락한 목회자를 여전히 감싸고 “우~리 목사님”하면서 교회를 다닐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아내 아닌 여자 앞에서 바지를 함부로 내리고 몸부림치는 인간을“우~리목사님” 하는 맹신족들이 이 사회의 지천에 깔려 있으니 다섯명에 한 명이 개신교인들이라고 하는데 사회는 더 음란해지며, 더 부패해지는 것이다.
목사도 불륜해도 끄떡 하지도 않는데 평신도인 나는 불륜해도 문제가 없겠지 하는 공범의식이 있으니 세계 3위 안에 들어갈 정도로 이혼률이 높으며, 고아들이 보육원에 차고 넘치고, 1년에 2천 500명 이상의 고아들이 해외에 입양되어지며, 수도권만 하여도 70만명 이상의 매춘여성들이 있다는 엄청난 사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태연히 불법을 행하고, 부도덕하여도 교인들이 오로지 “총폭탄” 이 되어서 그런 타락한 목회자를“침묵”으로 비호 하면서 꿈쩍도 하지 않는 이 집단정신질환적인 억제심리와 행동이 바로 교회는 물론이고 사회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교회들은 왜 인정하지 않는가? 불법과 불의와 천인공노할 비도덕을 보고도“침묵” 이라는 형태로 숨을 죽이고 있는 것은 “세뇌” 외는 설명할 방도가 없다.
“무신론공산주의자들에게 인민들이 세뇌 당하는 그 수법” 과 똑 같은 방식으로 교인들도 혹세무민 속에서 오랫동안 철저하게 “세뇌”를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이 타락하고, 갱신의 가망성이 미약한 이유는 타락한 목회자들과 직분자들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러한 타락한 자들에게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도록 세뇌된 “침묵”이 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타락한 목회자로부터 은혜를 받겠다고 자리를 채워주면서 기계적으로 “아멘” 하는 교인들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교인들의 “침묵” 의 주소를 찾아가면 “깊은 영성”이나 “예수님의 마음” 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한국교인들의 “침묵”은 “말하면 죽는다”는 조선 500년 봉건주의사회로부터 피 속에 흐르는“일단 살고 보자는 생존본능”과, 말하면 일본도에 목이 날아간다는 일제시대의 “비열한 생존본능”과, 바른 말하면 남산에 끌려갈지 모른다는 독재정권하에서 겪었던 “공포심 속에서 잘 먹기만 하면 되지 뭐, 조용히 살자” 하는 “기복적인 돼지본능”이 믹서가 되어 “침묵”이 골수에 박혀 버렸으며, 무한한 언론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본능적으로 “세뇌되고 강요된 침묵”이 교회 안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민교회의 상당수는 엄청난 불법 속에 휩싸여 있다. 교회이름으로 가짜 교직원, 가짜 전도사, 가짜 목사의 재직증명서를 발행하여 종교비자나 영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담임목회자-당회서기-재정부장이라는 삼각동맹 속에서 수천달러에서 수만달러를 받아먹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선교나 중국선교나 제3세계의 선교를 한다는 명목으로 영수증 없는 선교비를 교회나 개인들로부터 챙겨서 선교여행하는 척하면서 인마이포켓하는 골빈목회자들이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담임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받는 사례를 분산시켜 실제는 엄청난 혜택을 받으면서 안그런척 교인들에게 내숭을 떨고서는 뒷돈 또는 동정을 받는 "쇼맨쉽"도 대단하다.
그런데 연말감사 또는 공동의회에서 불의가 전부 드러나는데도 교인들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침묵하도록 길들여져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특히 이민교회는 수평이동이 심하기 때문에 교회 속에 만연하는 불법들에 대하여 교인들이 관여하기를 원치 않는다.
한마디로 그냥 이민의 삶에 지쳐서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종교생활이나 하고 사람들 만나서 키득꺼리는 친목회나 하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민교회는 갈등하는 본국교회보다 훨씬 더 썩어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침묵하는가? 그 뿌리 속에 길들여짐의 흔적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나는 왜 침묵할 수밖에 없는가? 그 뿌리 속에 어떤 녀석이 들어 앉아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나는 왜 침묵이 상습화 되어 있는가? 그 뿌리 속에 어떻게 세뇌되었는가를 보아야 한다.
두려움 속에서 불법과 불의에 침묵하도록 철저하게 세뇌되어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살아가는 그 모습이 과연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붙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며 “참영성” 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하셨는가? 외쳐야 할 때는 외치셨으며, 꾸짖어야 할 때는 꾸짖으셨고, 탄식해야 할 때는 탄식하셨고, 부르짖어야 할 때는 부르짖었으며, 울어야 할 때는 울었고, 침묵해야 할 때는 침묵하셨으며, 아파해야 할 때는 아파하셨으며, 울부짖어야 할 때는 울부짖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가? 외쳐야 할 때는 뒤로 궁시렁거리고, 꾸짖어야 할 때는 아부하고, 탄식해야 할 때는 씩씩거리고, 부르짖어야 할 때는 내 배만 채워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울어야 할 때는 웃어버리고, 침묵해야 할 때는 변명하고, 아파해야 할 때는 낄낄거리며, 울부짖어야 할 때는 입다물어 버리는 상태는 아닌가?
지난 10년 동안 왜 교회와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며, 타종교는 전부 성장하였는데 개신교회 만큼은 왜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는가?
그 진짜 이유는 "지속적인 세뇌와 침묵의 반강요" 속에서 복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 죄를 꾸짖는 그리스도인, 이 땅의 죄악들을 보고서 탄식하는 그리스도인, 주님의 나라와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부르짖는 그리스도인, 죄를 붙잡고서 애통하는 그리스도인,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따라가는 침묵하는 그리스도인,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인, 죄를 회개치 않으면 망할지 모른다는 절박감으로 이 땅의 교회들을 위하여 울부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퀘이커는 누구나 내면의 빛(또는 '하나님/하느님의 씨앗', '하나님/하느님의 영', '그리스도' 등으로 불림)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의 내면의 빛을 바라봄으로써 신적 체험을 경험하고,하느님(하나님)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퀘이커 신도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며, 스스로와 타인에게 진실 된 삶을 살려 노력한다. 또한, 하나님/하느님과의 교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에 예배중 진행하는 예배자가 없이, 교도들이 예배당 (meeting house)에 앉아 묵상한다. 그렇게 묵상하던 중에 스스로에게 떠오른 영적인 생각이나 감명 깊게 다가온 노래, 시편, 성서, 말씀, 연주 등을 나눈다.
Orthodox Quaker(정통파 퀘이커)들은 예배당 (meeting house)에 시계를 걸지 않고, 어떤 예배당에서는 예배 시작 전부터 문을 여는 사람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하거나 악기 연주, 찬송가를 부르는 등 예배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틀은 같다.
퀘이커의 예배특징은 침묵의 예배로써, 퀘이커 각자는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예배를 이끌어가는 별도의 사제나,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
또, 퀘이커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감사하기 때문에 퀘이커교의 중심적인 교리 (내면의 빛 등)를 따른다면 교도들이 어떤 문화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기독교적 퀘이커, 유대인적 퀘이커, 불교적 퀘이커, 무신론적 퀘이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 또한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고 있다. 실례로 베트남 전쟁 당시, 퀘이커 교인들은 메노나이트 교인들과 더불어 양심적 병역거부와 반전운동을 한 바 있다.
대부분의 퀘이커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스스로가 인체에 유해한 약물에 대한 인체실험 대상으로 자원하였고,현재도 2차대전 당시 양심적 병역 거부로 인해 귀가 들리지 않거나 운신이 힘든 퀘이커 교도 등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퀘이커 신도들은 검소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며, 스스로와 타인에게 진실 된 삶을 살려 노력한다. 또한, 하나님/하느님과의 교감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에 예배중 진행하는 예배자가 없이, 교도들이 예배당 (meeting house)에 앉아 묵상한다. 그렇게 묵상하던 중에 스스로에게 떠오른 영적인 생각이나 감명 깊게 다가온 노래, 시편, 성서, 말씀, 연주 등을 나눈다.
Orthodox Quaker(정통파 퀘이커)들은 예배당 (meeting house)에 시계를 걸지 않고, 어떤 예배당에서는 예배 시작 전부터 문을 여는 사람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하거나 악기 연주, 찬송가를 부르는 등 예배당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틀은 같다.
퀘이커의 예배특징은 침묵의 예배로써, 퀘이커 각자는 침묵을 통해 내면의 빛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으며, 예배를 이끌어가는 별도의 사제나, 성직자를 두지 않는다.
또, 퀘이커는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감사하기 때문에 퀘이커교의 중심적인 교리 (내면의 빛 등)를 따른다면 교도들이 어떤 문화에 속해 있느냐 하는 것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기독교적 퀘이커, 유대인적 퀘이커, 불교적 퀘이커, 무신론적 퀘이커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 또한 전쟁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장,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하고 있다. 실례로 베트남 전쟁 당시, 퀘이커 교인들은 메노나이트 교인들과 더불어 양심적 병역거부와 반전운동을 한 바 있다.
대부분의 퀘이커들은 전쟁에 참여하는 대신 스스로가 인체에 유해한 약물에 대한 인체실험 대상으로 자원하였고,현재도 2차대전 당시 양심적 병역 거부로 인해 귀가 들리지 않거나 운신이 힘든 퀘이커 교도 등을 볼 수 있다.
퀘이커교 단상들 / 그리스도교 이야기
한국에도 찾아보니 퀘이커교 모임이 있었다.
퀘이커교의 특징은 어떠한 조직도 형식도 없고 신부나 목사 등의 성직자도 없고,
개인의 계시를 중요시 여기고, 비폭력주의를 강하게 실천한다.
유명한 분으로는 함석헌 선생 그리고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신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계신다.
한명숙 총리도 퀘이커교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시지만,
미국에 있을 때 2년동안 퀘이커 모임에 다녀야지 퀘이커 멤버쉽을 얻을 수 있는데
1년 밖에 되지 않아 정식 회원 자격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한명숙 총리는 예전 경동교회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이셨는데...
하여튼 지금 한국에도 한 50명 정도의 교인이 있다고 한다.
한국 퀘이커 모임 사이트 : http://www.quakerseoul.org/
*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신성한 무엇이 있습니다.
There is something sacred in all people.
*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All people are equal before God.
* 종교는 삶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Religion is about the whole of life.
* 우리는 보다 깊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기 위해 고요한 가운데서 모입니다.
We meet in stillness to discover a deeper sense of God's presence.
* 참 종교는 지구와 그 위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데 이르게 합니다.
True religion leads to respect for the earth and all life upon it.
* 각 사람은 고유하며,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ach person is unique, precious, a child of God.
[출처] 퀘이커교|작성자 모피어스
한국에도 찾아보니 퀘이커교 모임이 있었다.
퀘이커교의 특징은 어떠한 조직도 형식도 없고 신부나 목사 등의 성직자도 없고,
개인의 계시를 중요시 여기고, 비폭력주의를 강하게 실천한다.
유명한 분으로는 함석헌 선생 그리고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신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계신다.
한명숙 총리도 퀘이커교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시지만,
미국에 있을 때 2년동안 퀘이커 모임에 다녀야지 퀘이커 멤버쉽을 얻을 수 있는데
1년 밖에 되지 않아 정식 회원 자격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한명숙 총리는 예전 경동교회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이셨는데...
하여튼 지금 한국에도 한 50명 정도의 교인이 있다고 한다.
한국 퀘이커 모임 사이트 : http://www.quakerseoul.org/
*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신성한 무엇이 있습니다.
There is something sacred in all people.
*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All people are equal before God.
* 종교는 삶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Religion is about the whole of life.
* 우리는 보다 깊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기 위해 고요한 가운데서 모입니다.
We meet in stillness to discover a deeper sense of God's presence.
* 참 종교는 지구와 그 위의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데 이르게 합니다.
True religion leads to respect for the earth and all life upon it.
* 각 사람은 고유하며,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ach person is unique, precious, a child of God.
[출처] 퀘이커교|작성자 모피어스
침묵의 기도…성령과 하나로 "올바른 삶이 선교" 교회도 성경도 없어
"세상에 이런 예배가 다 있을까." 서울 신촌 '퀘이커의 집'에는 십자가도 성경도 찬송도 설교도 없다. 대신 긴 침묵만이 흐른다. 말소리 하나 없는,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적막 그 자체다. 퀘이커의 침묵 예배는 성령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성령의 메시지가 있을 때만 일어나 입을 연다. 정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 직후 전해졌다.
군산도립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미국.영국인 퀘이커에 감화받은 사람들이 가정집을 돌며 예배를 시작한 게 벌써 50년이 됐다.
퀘이커 한국모임은 1960년대 함석헌 선생의 영향으로 붐을 이룬 적이 있으나 89년 함 선생이 타계하며 내부 혼란과 갈등으로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이후 10년 넘게 모임이 없었으나 4년 전 몇몇 옛 퀘이커의 노력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신촌 예배에는 10~20명이 참석한다.
예배 중 파란 눈 때문에 눈에 띄는 톰 코이너. 미국계 신용카드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의 한국 지사장으로 있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나 콜로라도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했다.
장로교 신자였지만 대학 시절 퀘이커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75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와 한국인과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퀘이커가 됐다. 함석헌 선생의 영문 홈페이지도 4년째 운영하고 있다.
부인 최예리씨는 불교적 퀘이커이다. 알고 보니 퀘이커의 성격은 다양하다. 가톨릭적 퀘이커가 있고 감리교에도 퀘이커 목사가 있다. 종교적 성향이 달라도 퀘이커가 될 수 있는 것.
코이너는 "교리나 이론보다 성령과 하나가 돼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신비주의 체험을 강조했다. 침묵 속에서 내면을 깊이 체험하면 성령으로 빨려들어간다는 얘기다.
"개신교가 성서 중심이라면 우리는 성령 중심입니다. 성령을 빼고 나면 뭐가 있을까요. 핵심은 '내면의 빛(the light within)'입니다."
17세기 영국인 조지 폭스가 제창한 퀘이커는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종교기구가 됐다. 초창기 필라델피아에서 크게 일어났고, 지금은 인디애나주와 아프리카 케냐에 신자가 많다. 하지만 전세계 퀘이커는 30만명에 불과하다.
퀘이커는 신앙.실천 모두 독특하다. 2년마다 선출되는 서기가 행정을 맡지만 성직자도 선교사도 없다. 올바로 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선교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교회 아이디어도 퀘이커에서 나왔다.
퀘이커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이다. 여성참정권 확보, 노예제 폐지, 월남전 반대 등에도 앞장섰다. 47년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는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퀘이커는 몇몇 종교처럼 병역을 거부한다. 퀘이커는 1차 대전 때 군복무의 일환으로 구제사업과 구급차 부대에서 일했고, 2차 대전 때는 병원 근무 등으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군수업체나 미군부대에선 퀘이커를 찾아 볼 수 없다.
'양심적 병역 거부' 논란이 일고 요즘 한국의 퀘이커도 신앙과 국방의 의무 사이에서 '대안'을 찾아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숫자는 적어도 세계 평화에 힘을 보태려는 그들의 선택이 주목된다.
"세상에 이런 예배가 다 있을까." 서울 신촌 '퀘이커의 집'에는 십자가도 성경도 찬송도 설교도 없다. 대신 긴 침묵만이 흐른다. 말소리 하나 없는, 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는 적막 그 자체다. 퀘이커의 침묵 예배는 성령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성령의 메시지가 있을 때만 일어나 입을 연다. 정식 명칭은 종교 친우회(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우리나라에는 한국전쟁 직후 전해졌다.
군산도립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하던 미국.영국인 퀘이커에 감화받은 사람들이 가정집을 돌며 예배를 시작한 게 벌써 50년이 됐다.
퀘이커 한국모임은 1960년대 함석헌 선생의 영향으로 붐을 이룬 적이 있으나 89년 함 선생이 타계하며 내부 혼란과 갈등으로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이후 10년 넘게 모임이 없었으나 4년 전 몇몇 옛 퀘이커의 노력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신촌 예배에는 10~20명이 참석한다.
예배 중 파란 눈 때문에 눈에 띄는 톰 코이너. 미국계 신용카드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의 한국 지사장으로 있다. 미국 오리건주에서 태어나 콜로라도 대학에서 일본학을 전공했다.
장로교 신자였지만 대학 시절 퀘이커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곤 했다. 75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와 한국인과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퀘이커가 됐다. 함석헌 선생의 영문 홈페이지도 4년째 운영하고 있다.
부인 최예리씨는 불교적 퀘이커이다. 알고 보니 퀘이커의 성격은 다양하다. 가톨릭적 퀘이커가 있고 감리교에도 퀘이커 목사가 있다. 종교적 성향이 달라도 퀘이커가 될 수 있는 것.
코이너는 "교리나 이론보다 성령과 하나가 돼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신비주의 체험을 강조했다. 침묵 속에서 내면을 깊이 체험하면 성령으로 빨려들어간다는 얘기다.
"개신교가 성서 중심이라면 우리는 성령 중심입니다. 성령을 빼고 나면 뭐가 있을까요. 핵심은 '내면의 빛(the light within)'입니다."
17세기 영국인 조지 폭스가 제창한 퀘이커는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종교기구가 됐다. 초창기 필라델피아에서 크게 일어났고, 지금은 인디애나주와 아프리카 케냐에 신자가 많다. 하지만 전세계 퀘이커는 30만명에 불과하다.
퀘이커는 신앙.실천 모두 독특하다. 2년마다 선출되는 서기가 행정을 맡지만 성직자도 선교사도 없다. 올바로 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선교라고 믿기 때문이다. 무교회 아이디어도 퀘이커에서 나왔다.
퀘이커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이다. 여성참정권 확보, 노예제 폐지, 월남전 반대 등에도 앞장섰다. 47년 미국 퀘이커 봉사위원회인 AFSC(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는 영국 퀘이커 봉사협회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퀘이커는 몇몇 종교처럼 병역을 거부한다. 퀘이커는 1차 대전 때 군복무의 일환으로 구제사업과 구급차 부대에서 일했고, 2차 대전 때는 병원 근무 등으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군수업체나 미군부대에선 퀘이커를 찾아 볼 수 없다.
'양심적 병역 거부' 논란이 일고 요즘 한국의 퀘이커도 신앙과 국방의 의무 사이에서 '대안'을 찾아야 할 숙제를 안고 있다. 숫자는 적어도 세계 평화에 힘을 보태려는 그들의 선택이 주목된다.
침묵의 힘과 퀘이커교
두 연인이 마주보며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로 말을 주고 받다가 말이 끊긴다. 그러자 황급하게 다른 주제에 대해 말을 이어 나간다. 이번에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금 전처럼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미리 다음의 화제를 머리 속으로 생각하느라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다.
그(녀)는 무엇인가 말하거나 듣고 있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언제 어디서나 이어폰을 떼어놓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회는 쟁취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이다. 그(녀)는 최대한으로 말할 기회를 만들어내어 자기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입을 봉하고 있는 자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그런 '종자'는 얼마 되지 않아 틀림없이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자기선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라, '실패의 지름길'일 뿐이다. 그들은 침묵을 참지 못한다. 침묵은 어색한 것이며 짜증스러운 것이다. 서로 말없이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는 연인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퀘이커교 신자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퀘이커교 신앙에서 침묵은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퀘이커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있다. 바로 모래시계의 비유이다. 모래시계에는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릴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허리'가 있다. 퀘이커교에서 기도와 예배가 모래라면, 모래의 '허리'는 바로 침묵이다. 퀘이커교 신자들은 침묵에 의해 걸러지지 않는 기도를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침묵은 '내적인 빛'과 만나기 위해 꼭 지나가야 하는 통로이다. 퀘이커교에 따르면 인간 각자의 내부에는 신성(神聖)이 심연처럼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그 신성의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 내적인 여행을 떠나야 할 의무가 있다. 침묵 가운데 있는 것은 바로 그 여행의 문을 여는 것이고,침묵은 우리를 온통 뒤바꿔 놓을 여행의 안내자인 것이다. 한마디로 침묵은 인간에게 내려 준 신의 선물인 셈이다.
퀘이커의 집회는 침묵 가운데 이루어진다. 가끔 모임이 완전한 침묵에 사로잡혀 도무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일도 생긴다. 침묵이 깨지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 안에서 '내부의 빛'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을 때이다. 그러면 그 날 모임은 그(녀)가 인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예배가 행해지므로 따로 교직자를 둘 필요가 없다.
퀘이커교는 교회의 계급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내부의 빛'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므로 서로 완벽히 평등하다.
퀘이커교 신자들이 온갖 종류의 인간 불평등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이와같이 인간 속에 있는 신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차별, 성적 차별, 종교차별, 그리고 갖가지 사회-경제적 차별을 그대로 좌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차별행위를 알면서도 그 철폐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 '내부의 빛'에 대한 모독이고, 결국 신에 대한 거역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퀘이커의 침묵은 사회정의를 위한 적극적인 행위와 연결된다. 침묵을 통해 신에 드리는 예배와 사회적인 행동의 차원이 동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밀접히 묶여지는 것이다. 그들의 평화주의는 소극적이지 않고 매우 적극적이다.
1952년 8월 29일 뉴욕의 우드스톡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가 '4분 33초'라는 곡을 선보였을 때 많은 청중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짜증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이도 많았다. 그들은 등장한 피아니스트가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없이 앉아 있는 것을 황당한 관객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만약 그 자리에 퀘이커교 신자들이 있었다면,피아니스트가 마련해준 4분 33초의 침묵을 흡족하게 즐겼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기형도의 시(詩) '소리의 뼈'에 나오는 김교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자신은 침묵함으로써 다음 학기에 학생들의 귀를 밝게 만든 김교수를 퀘이커교 신자들이 낯설어 할 리 없다. 그들은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더욱 충만해지는 오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말의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침묵은 말의 근원이다. 침묵이 있으므로 비로소 말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산사의 절간도 소음에 찌들게 된 요즈음, 나는 우리나라에 퀘이커 신자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고 바란다.
두 연인이 마주보며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로 말을 주고 받다가 말이 끊긴다. 그러자 황급하게 다른 주제에 대해 말을 이어 나간다. 이번에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금 전처럼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미리 다음의 화제를 머리 속으로 생각하느라고,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다.
그(녀)는 무엇인가 말하거나 듣고 있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안해진다. 언제 어디서나 이어폰을 떼어놓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회는 쟁취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것이 그(녀)의 좌우명이다. 그(녀)는 최대한으로 말할 기회를 만들어내어 자기가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입을 봉하고 있는 자는 무능력한 사람이다. 그런 '종자'는 얼마 되지 않아 틀림없이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 것이다. 지금은 자기선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에게 '침묵은 금'이 아니라, '실패의 지름길'일 뿐이다. 그들은 침묵을 참지 못한다. 침묵은 어색한 것이며 짜증스러운 것이다. 서로 말없이 몇 시간 동안이나 앉아 있는 연인을 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퀘이커교 신자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퀘이커교 신앙에서 침묵은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묵이 퀘이커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있다. 바로 모래시계의 비유이다. 모래시계에는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릴 때 반드시 거쳐야하는 '허리'가 있다. 퀘이커교에서 기도와 예배가 모래라면, 모래의 '허리'는 바로 침묵이다. 퀘이커교 신자들은 침묵에 의해 걸러지지 않는 기도를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침묵은 '내적인 빛'과 만나기 위해 꼭 지나가야 하는 통로이다. 퀘이커교에 따르면 인간 각자의 내부에는 신성(神聖)이 심연처럼 자리잡고 있다. 인간은 그 신성의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 내적인 여행을 떠나야 할 의무가 있다. 침묵 가운데 있는 것은 바로 그 여행의 문을 여는 것이고,침묵은 우리를 온통 뒤바꿔 놓을 여행의 안내자인 것이다. 한마디로 침묵은 인간에게 내려 준 신의 선물인 셈이다.
퀘이커의 집회는 침묵 가운데 이루어진다. 가끔 모임이 완전한 침묵에 사로잡혀 도무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일도 생긴다. 침묵이 깨지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 안에서 '내부의 빛'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을 때이다. 그러면 그 날 모임은 그(녀)가 인도한다. 이런 방식으로 예배가 행해지므로 따로 교직자를 둘 필요가 없다.
퀘이커교는 교회의 계급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내부의 빛'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므로 서로 완벽히 평등하다.
퀘이커교 신자들이 온갖 종류의 인간 불평등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도 이와같이 인간 속에 있는 신성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차별, 성적 차별, 종교차별, 그리고 갖가지 사회-경제적 차별을 그대로 좌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차별행위를 알면서도 그 철폐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간 '내부의 빛'에 대한 모독이고, 결국 신에 대한 거역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퀘이커의 침묵은 사회정의를 위한 적극적인 행위와 연결된다. 침묵을 통해 신에 드리는 예배와 사회적인 행동의 차원이 동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밀접히 묶여지는 것이다. 그들의 평화주의는 소극적이지 않고 매우 적극적이다.
1952년 8월 29일 뉴욕의 우드스톡에서 작곡가 존 케이지가 '4분 33초'라는 곡을 선보였을 때 많은 청중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짜증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이도 많았다. 그들은 등장한 피아니스트가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없이 앉아 있는 것을 황당한 관객 모독이라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나는 만약 그 자리에 퀘이커교 신자들이 있었다면,피아니스트가 마련해준 4분 33초의 침묵을 흡족하게 즐겼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들은 기형도의 시(詩) '소리의 뼈'에 나오는 김교수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리의 뼈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학생들에게 던지고 자신은 침묵함으로써 다음 학기에 학생들의 귀를 밝게 만든 김교수를 퀘이커교 신자들이 낯설어 할 리 없다. 그들은 자신을 비우면 비울수록 더욱 충만해지는 오묘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침묵은 말의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침묵은 말의 근원이다. 침묵이 있으므로 비로소 말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산사의 절간도 소음에 찌들게 된 요즈음, 나는 우리나라에 퀘이커 신자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고 바란다.
퀘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본문
프렌드 협회라고도 한다. 1647년 영국인 G.폭스가 창시하였고 1650년대 이후 미국에 포교가 적극적으로 행해졌다. 특히 1681년의 W.펜에 의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건설은 영국과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에서 박해를 받고 있던 퀘이커 교도에게 신교(信敎)의 자유천지를 약속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들은 ‘안으로부터의 빛’을 믿고, 그 신앙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나 또 인디언과의 우호(友好), 흑인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반대, 전쟁 반대, 양심적 징병거부, 십일조 반대 등 일반 사람의 태도와 달라 특수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정통파와 히크사이트로 분열하였다가 화해하였다. 미국과 캐나다에 약 13만 이상의 교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퀘이커교도로는 함석헌(咸錫憲)이 있으며, 그는 19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대표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본문
프렌드 협회라고도 한다. 1647년 영국인 G.폭스가 창시하였고 1650년대 이후 미국에 포교가 적극적으로 행해졌다. 특히 1681년의 W.펜에 의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건설은 영국과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에서 박해를 받고 있던 퀘이커 교도에게 신교(信敎)의 자유천지를 약속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그들은 ‘안으로부터의 빛’을 믿고, 그 신앙의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나 또 인디언과의 우호(友好), 흑인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반대, 전쟁 반대, 양심적 징병거부, 십일조 반대 등 일반 사람의 태도와 달라 특수한 사람들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전반에 정통파와 히크사이트로 분열하였다가 화해하였다. 미국과 캐나다에 약 13만 이상의 교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퀘이커교도로는 함석헌(咸錫憲)이 있으며, 그는 19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대표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퀘이커교
Society of Friends, Friends church라고도 함.
17세기 중반 영국과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집단.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느님을 직접 내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는 순서를 가지며, 특히 사회 개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퀘이커교는 17세기 영국 청교도운동의 극좌파에 해당한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청년시절 그리스도교도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여러 해 동안 영적인 도움을 찾아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옮겨다녔다. 폭스의 〈일기 Journal〉에는 "네 상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음성을 들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이던 당시 그가 이 메시지를 전파하자 〈신약성서〉 형태로 교회를 세우기를 바라던 독립교회주의자들과 구도파 등의 분파들로부터 추종자들이 생겼다. 폭스가 메시지를 전할 때 주로 강조한 것은, 첫째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 둘째 특별한 건물이나 안수받은 성직자가 필요없다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퀘이커교도들은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사전 준비 없이, 또한 설교자를 정해놓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느님이 예배자들 가운데 하나를 설교자로 삼을 것이라고 믿었다.
퀘이커교가 영국 북부에 급속히 퍼진 뒤, 열정적이고 광범위한 운동이 런던, 잉글랜드 나머지 지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유럽 대륙, 북아메리카에 잇달아 일어났다. 신세계에서 퀘이커교 선교활동의 중심지는 뉴잉글랜드·뉴암스테르담·롱아일랜드·메릴랜드·버지니아·서인도제도였다. 크롬웰의 말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폭스는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퀘이커교도들과 함께 영국 전역을 다니며 교회 모임들을 세우고 전도 사역의 일환으로 '진리를 선포'했다. 17세기말에는 식민주들 가운데 연례 모임이 생겼다.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영국의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웨스트뉴저지를 주고, 그의 의도대로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이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를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 자유를 위한 안식처로 삼게 했다(→ 종교적 관용). 관용법(1689)으로 인해 영국에서 자행되던 극심한 박해는 그쳤으나, 법의 제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국교도들에게는 공무원이 되거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기 때문에 퀘이커교도들은 주로 상업과 공업에 종사했다. 퀘이커교도들은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파산시에는 엄격한 관리를 하여 조그만 자영업을 큰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그결과 성실하다는 평판을 받게 되어 이웃들이 안심하고 돈을 맡기게 되었으며, 많은 지방 은행들을 세우게 되었다.
퀘이커교는 18세기에 2가지 상충되는 경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정적주의는 신의 인도에 복종하는 소극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태도를 장려했던 반면, 웨슬리주의의 열정 및 신학과 복음주의 운동은 새로운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긴장이 18, 19세기 퀘이커교에 여러 분열을 일으켰다. 분열이 가장 심했던 미국에서는 엘리어스 힉스가 신(新)신학을 불신하고 많은 지역 연례 모임을 만들었다(→ 힉스). 19세기초부터 퀘이커교도들은 당시 점점 늘어나던 미국의 서부 이주 대열에 참여했다. 이들은 부흥운동 방법을 받아들여 예배 때 찬송과 고정된 설교 순서를 두고, 급료를 받는 목사를 세움으로써 그에 반발하는 전통적인 퀘이커교도들의 이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20세기초에는 다음의 세 파가 존재했다. ① '정통파' 또는 '복음주의파'는 서로간에 또는 런던 및 아일랜드 교도들과 연례 모임을 가졌다. ② '보수파'는 원래 퀘이커교도들의 예배·연설·복장 형식을 따르면서 연례 모임을 가졌다. ③ '힉스파'는 70년간 다른 퀘이커교도들과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점점 더 '현대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파들로부터 유니테리언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이후에 여러 퀘이커 단체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의심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협력과 재연합이 잇달았다. 유럽 대륙에서는 처음 퀘이커교의 영향으로 세워졌던 모임들이 점차 시들어갔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에서는 퀘이커교도들이 벌인 전후 구제사업이 그 운동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말에는 선교 사업과 함께 이민이 시작되어 세계 모든 지역에서 연례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다.
퀘이커교의 교회 정치체제는 근본적으로는 조지 폭스 시대 이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가장 중요한 단위는 월례 모임으로서, 이 모임은 1개월에 1번 정기적으로 만나 교도들의 모든 문제들, 재정과 재산, 교도들이 개별적으로 제기하거나 상위모임에 의뢰한 관심사에 대해 논의한다(→ 퀘이커 연합회, 퀘이커 총회). 초기 퀘이커교 예배의식의 극히 엄격한 성격은 많은 지역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 순서를 마련하고, 설교를 미리 준비하는 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수정되어왔다. 그리스도교 교파들 가운데 성례전을 외적 형식으로 준수하지 않는 교파는 거의 퀘이커교뿐이다. 그들은 영적인 세례와 성찬을 믿는다. 퀘이커교는 형제단 및 메노파와 함께 '역사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교회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퀘이커교는 전쟁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평화주의). 퀘이커교는 여러 세대에 걸쳐 노예제 철폐, 여성들의 권리 신장, 금주령, 사형제도 폐지, 형법 개혁, 정신병자들에 대한 보호 등을 주장해왔다
17세기 중반 영국과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그리스도교 집단.
이들은 신조, 성직자, 또는 기성교회가 지니고 있는 그밖의 다른 형식 없이도 하느님을 직접 내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집회를 가질 때 '내면의 빛' 또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신성'을 조용히 기다리는 순서를 가지며, 특히 사회 개혁에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퀘이커교는 17세기 영국 청교도운동의 극좌파에 해당한다. 창시자 조지 폭스는 청년시절 그리스도교도들의 위선에 환멸을 느끼고 여러 해 동안 영적인 도움을 찾아 이 집단에서 저 집단으로 옮겨다녔다. 폭스의 〈일기 Journal〉에는 "네 상태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고 말하는 음성을 들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7세기 중반이던 당시 그가 이 메시지를 전파하자 〈신약성서〉 형태로 교회를 세우기를 바라던 독립교회주의자들과 구도파 등의 분파들로부터 추종자들이 생겼다. 폭스가 메시지를 전할 때 주로 강조한 것은, 첫째 그리스도가 직접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 둘째 특별한 건물이나 안수받은 성직자가 필요없다는 것, 셋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퀘이커교도들은 어떤 종류의 의식이나 사전 준비 없이, 또한 설교자를 정해놓지 않고 예배를 드렸다. 열정과 기대를 가지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으면 하느님이 예배자들 가운데 하나를 설교자로 삼을 것이라고 믿었다.
퀘이커교가 영국 북부에 급속히 퍼진 뒤, 열정적이고 광범위한 운동이 런던, 잉글랜드 나머지 지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유럽 대륙, 북아메리카에 잇달아 일어났다. 신세계에서 퀘이커교 선교활동의 중심지는 뉴잉글랜드·뉴암스테르담·롱아일랜드·메릴랜드·버지니아·서인도제도였다. 크롬웰의 말에 따르면 퀘이커교도들은 "난잡하고 무질서한 예배의식 때문에"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다. 450명 이상이 퀘이커 조례(1662)와 그와 유사한 규제법으로 영국 감옥에서 죽었다. 폭스는 이러한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퀘이커교도들과 함께 영국 전역을 다니며 교회 모임들을 세우고 전도 사역의 일환으로 '진리를 선포'했다. 17세기말에는 식민주들 가운데 연례 모임이 생겼다. 1681년 영국의 왕 찰스 2세는 영국의 퀘이커교 지도자 윌리엄 펜에게 웨스트뉴저지를 주고, 그의 의도대로 새로운 식민지 펜실베이니아(펜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음)를 동료 퀘이커교도들의 신앙 자유를 위한 안식처로 삼게 했다(→ 종교적 관용). 관용법(1689)으로 인해 영국에서 자행되던 극심한 박해는 그쳤으나, 법의 제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국교도들에게는 공무원이 되거나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제한했기 때문에 퀘이커교도들은 주로 상업과 공업에 종사했다. 퀘이커교도들은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파산시에는 엄격한 관리를 하여 조그만 자영업을 큰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그결과 성실하다는 평판을 받게 되어 이웃들이 안심하고 돈을 맡기게 되었으며, 많은 지방 은행들을 세우게 되었다.
퀘이커교는 18세기에 2가지 상충되는 경향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정적주의는 신의 인도에 복종하는 소극적이고 자기 부정적인 태도를 장려했던 반면, 웨슬리주의의 열정 및 신학과 복음주의 운동은 새로운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긴장이 18, 19세기 퀘이커교에 여러 분열을 일으켰다. 분열이 가장 심했던 미국에서는 엘리어스 힉스가 신(新)신학을 불신하고 많은 지역 연례 모임을 만들었다(→ 힉스). 19세기초부터 퀘이커교도들은 당시 점점 늘어나던 미국의 서부 이주 대열에 참여했다. 이들은 부흥운동 방법을 받아들여 예배 때 찬송과 고정된 설교 순서를 두고, 급료를 받는 목사를 세움으로써 그에 반발하는 전통적인 퀘이커교도들의 이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20세기초에는 다음의 세 파가 존재했다. ① '정통파' 또는 '복음주의파'는 서로간에 또는 런던 및 아일랜드 교도들과 연례 모임을 가졌다. ② '보수파'는 원래 퀘이커교도들의 예배·연설·복장 형식을 따르면서 연례 모임을 가졌다. ③ '힉스파'는 70년간 다른 퀘이커교도들과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점점 더 '현대 사상'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파들로부터 유니테리언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이후에 여러 퀘이커 단체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의심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협력과 재연합이 잇달았다. 유럽 대륙에서는 처음 퀘이커교의 영향으로 세워졌던 모임들이 점차 시들어갔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에서는 퀘이커교도들이 벌인 전후 구제사업이 그 운동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세기말에는 선교 사업과 함께 이민이 시작되어 세계 모든 지역에서 연례 모임이 생겨나게 되었다.
퀘이커교의 교회 정치체제는 근본적으로는 조지 폭스 시대 이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가장 중요한 단위는 월례 모임으로서, 이 모임은 1개월에 1번 정기적으로 만나 교도들의 모든 문제들, 재정과 재산, 교도들이 개별적으로 제기하거나 상위모임에 의뢰한 관심사에 대해 논의한다(→ 퀘이커 연합회, 퀘이커 총회). 초기 퀘이커교 예배의식의 극히 엄격한 성격은 많은 지역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 순서를 마련하고, 설교를 미리 준비하는 방식을 받아들임으로써 수정되어왔다. 그리스도교 교파들 가운데 성례전을 외적 형식으로 준수하지 않는 교파는 거의 퀘이커교뿐이다. 그들은 영적인 세례와 성찬을 믿는다. 퀘이커교는 형제단 및 메노파와 함께 '역사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교회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퀘이커교는 전쟁이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라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평화주의). 퀘이커교는 여러 세대에 걸쳐 노예제 철폐, 여성들의 권리 신장, 금주령, 사형제도 폐지, 형법 개혁, 정신병자들에 대한 보호 등을 주장해왔다
Compositor: Pete Seeger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Girls have picked them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young girl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young girl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young girls gone?
Taken husbands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young men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young men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young men gone?
Gone for soldiers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soldier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soldier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soldiers gone?
Gone to graveyards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Covered with flowers every one
When will we ever learn?
When will we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Girls have picked them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young girl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young girl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young girls gone?
Taken husbands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young men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young men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young men gone?
Gone for soldiers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soldier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soldier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soldiers gone?
Gone to graveyards every one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n will they ever learn?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Long time passing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Long time ago
Where have all the graveyards gone?
Covered with flowers every one
When will we ever learn?
When will we ever learn?
The River in the Pines - Joan Baez
솔밭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Oh, Mary was a maiden
When the birds began to sing
She was sweeter than the blooming rose
So early in the spring
Her thoughts were gay and happy
And the morning gay and fine
For her lover was a river boy
From the river in the pines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면
메리는 이른 봄 피어나는 장미보다
더 매혹적인 소녀랍니다
즐겁고 행복한 생각에
상쾌하고 좋은 아침
솔숲 사이의 강에 사는 소년이
그녀의 연인이기 때문이죠
Now Charlie, he got married
To his Mary in thespring
When the trees were budding early
And the birds began to sing
But early in the autumn
When the fruit is in the wine
I'll return to you, my darling
From the river in the pines
지금 그 소년 찰리는
소나무들이 막 싹트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에 메리랑 결혼을 하고
초가을이 되자 술익을때쯤
솔숲 사이의 강에서 돌아오겠노라며 떠나갔죠
'Twas early in the morning
In Wisconsin dreary clime
When he ruled the fatal rapid
For that last and fatal time
They found his body lying
On the Rocky shore below
Where the silent water ripples
And the whispering cedars blow
황량한 기후의 위스콘신의 이른 아침이었어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적인 물살에 휩쓸려
빠져나오려한 시각이..
고요한 물결이 일렁이고
속삭이는 삼나무가 울창한 곳 아래의
암석 해안에서 그가 숨진걸 발견했어요
Now every raft or lumber
That's come down, the chip away
There's a lonely grave that's
visited by drivers on their way
They plant the wild flowers upon it
In the morning fair and fine
'Tis the grave of two young lovers
From the river in the pines
현재는 뗏목이나 기타 다른 잡동사니들이
내려와서 작은 조각들로 사라지죠
거기엔 길가던 운전자들이 방문해서
야생화를 심은 외로운 무덤이 있어요
아침마다 꽤 괜찮게 보이는군요
이게 솔숲 사이 강가에서 살던
두 연인들을 기리기 위한 무덤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한 곡입니다. 존_바에즈 의 대표곡중 하나인 River in the pines 입니다.
- 젊은 시절 지성과 미모와 하늘이 내린
목소리를 지니고 높은 인기를 얻었던 존 바에즈
명문 보스턴 대학 출신의 지성적인 가수이자 70년대 저항운동의 기수였던 밥딜런과 함께 포크 가수로 유명한 조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바에즈는 아버지가 멕시코계라는 이유와 그녀의 갈색 피부로 인해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어릴 때 환경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고 맑은 미소를 간직한 바에즈.
바에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무릅썼습니다. 베트남의 하노이, 북아일랜드, 튀니지, 아르헨티나, 레바논에서 노래했고, 억울하게 구금당한 사람의 사면을 위해서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를 위해 노래했고, 캄보디아를 위해 노래했습니다.
레이건 집권후 더 한층 강화된 미국의 보수주의 물결 속에서도 19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을 강행했습니다.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이 모든 일을 끝까지 해냈습니다. 또한 그녀는 핵무기 제조 및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83년 유럽을 순회공연했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해 12만 명의 군중 속에서 노래해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존 바에즈는 한때 1년공연의 개런티로 10만불을 제시한 프로모터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포크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음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솔밭사이로 강물이 흐르고
Oh, Mary was a maiden
When the birds began to sing
She was sweeter than the blooming rose
So early in the spring
Her thoughts were gay and happy
And the morning gay and fine
For her lover was a river boy
From the river in the pines
새들이 노래하기 시작하면
메리는 이른 봄 피어나는 장미보다
더 매혹적인 소녀랍니다
즐겁고 행복한 생각에
상쾌하고 좋은 아침
솔숲 사이의 강에 사는 소년이
그녀의 연인이기 때문이죠
Now Charlie, he got married
To his Mary in thespring
When the trees were budding early
And the birds began to sing
But early in the autumn
When the fruit is in the wine
I'll return to you, my darling
From the river in the pines
지금 그 소년 찰리는
소나무들이 막 싹트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에 메리랑 결혼을 하고
초가을이 되자 술익을때쯤
솔숲 사이의 강에서 돌아오겠노라며 떠나갔죠
'Twas early in the morning
In Wisconsin dreary clime
When he ruled the fatal rapid
For that last and fatal time
They found his body lying
On the Rocky shore below
Where the silent water ripples
And the whispering cedars blow
황량한 기후의 위스콘신의 이른 아침이었어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적인 물살에 휩쓸려
빠져나오려한 시각이..
고요한 물결이 일렁이고
속삭이는 삼나무가 울창한 곳 아래의
암석 해안에서 그가 숨진걸 발견했어요
Now every raft or lumber
That's come down, the chip away
There's a lonely grave that's
visited by drivers on their way
They plant the wild flowers upon it
In the morning fair and fine
'Tis the grave of two young lovers
From the river in the pines
현재는 뗏목이나 기타 다른 잡동사니들이
내려와서 작은 조각들로 사라지죠
거기엔 길가던 운전자들이 방문해서
야생화를 심은 외로운 무덤이 있어요
아침마다 꽤 괜찮게 보이는군요
이게 솔숲 사이 강가에서 살던
두 연인들을 기리기 위한 무덤이죠
우리나라에서는 <솔밭 사이로 강물은 흐르고> 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한 곡입니다. 존_바에즈 의 대표곡중 하나인 River in the pines 입니다.
- 젊은 시절 지성과 미모와 하늘이 내린
목소리를 지니고 높은 인기를 얻었던 존 바에즈
명문 보스턴 대학 출신의 지성적인 가수이자 70년대 저항운동의 기수였던 밥딜런과 함께 포크 가수로 유명한 조운 샨도스 바에즈(Joan Chandos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의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 물리학자인 아버지 알베르트 바에즈(Albert Baez)와 스코틀랜트 출신의 어머니 존 브릿지 바에즈(Joan Bridge Baez)의 세 딸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희곡 작가이자 교사였고, 아버지는 물리학자이자 유네스코(UNESCO)의 콘설턴트 일도 맡아 미국은 물론 전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연구하는 일을 해야했기 때문에 어린 존 바에즈는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바에즈는 아버지가 멕시코계라는 이유와 그녀의 갈색 피부로 인해 인종차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핵물리학자로 여러 방위산업체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는 유능한 인재였지만 핵무기에 반대했기 때문에 이런 제의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바에즈가 반전평화운동가이자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런 아버지의 영향과 어릴 때 환경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나이가 들어도 아름답고 맑은 미소를 간직한 바에즈.
바에즈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무릅썼습니다. 베트남의 하노이, 북아일랜드, 튀니지, 아르헨티나, 레바논에서 노래했고, 억울하게 구금당한 사람의 사면을 위해서 노래했습니다. 그녀는 모스크바에서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를 위해 노래했고, 캄보디아를 위해 노래했습니다.
레이건 집권후 더 한층 강화된 미국의 보수주의 물결 속에서도 1981년 라틴 아메리카에서 5주간의 콘서트와 인권 실태조사 여행을 강행했습니다. 여행 도중 그녀는 경찰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지만 이 모든 일을 끝까지 해냈습니다. 또한 그녀는 핵무기 제조 및 사용 중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83년 유럽을 순회공연했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파리의 비폭력주의에 바치는 무료 콘서트를 개최해 12만 명의 군중 속에서 노래해 프랑스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런 활동들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존 바에즈는 한때 1년공연의 개런티로 10만불을 제시한 프로모터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포크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음악이라고 말할 수 없다."
Donna Donna
아름다운 목소리로 서정적인 포크 음악에서 격렬한 반전 음악 까지 다양한 색깔의 음악으로 사랑받고 있는 포크 싱어
이자 인권 운동가이며 반전 평화 운동가이기도 한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주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58년 어머니의 권유와 아버지의 새로운 직장 때문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그녀는 보스톤 대학(Boston University)
의 연극학과에 입학하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가수 활동을 하기 위하여 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1959년 캠브리지(Cambridge)의 포크 음악 클럽인 클럽 47(Club 47)에 정규 출연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바에즈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 출전하여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60년에
포크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Vanguard Recording Society)와 장기 계약을 맺고 데뷔 음반을 발매하였다.
1960년에 발매된 데뷔 음반 Joan Baez 는 민요와 발라드, 그리고 전통적인 포크 음악들을 수록하고 있으며, 수록곡
가운데 유태인들의 기구한 삶을 영문도 모른채 도살장으로 실려가는 소의 모습과 대비시켜 비장하고 서글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스라엘 민요 곡인 Donna Donna 는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이자 인권 운동가이며 반전 평화 운동가이기도 한 조안 바에즈(Joan Baez)는 1941년 1월 9일 미국 뉴욕주 스태이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에서 멕시코 출신의 물리학자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1958년 어머니의 권유와 아버지의 새로운 직장 때문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그녀는 보스톤 대학(Boston University)
의 연극학과에 입학하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가수 활동을 하기 위하여 학교를 중퇴하게 된다.
1959년 캠브리지(Cambridge)의 포크 음악 클럽인 클럽 47(Club 47)에 정규 출연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바에즈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The Newport Folk Festival)에 출전하여 대중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1960년에
포크 전문 레이블인 뱅가드(Vanguard Recording Society)와 장기 계약을 맺고 데뷔 음반을 발매하였다.
1960년에 발매된 데뷔 음반 Joan Baez 는 민요와 발라드, 그리고 전통적인 포크 음악들을 수록하고 있으며, 수록곡
가운데 유태인들의 기구한 삶을 영문도 모른채 도살장으로 실려가는 소의 모습과 대비시켜 비장하고 서글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스라엘 민요 곡인 Donna Donna 는 한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DONNA DONNA - Joan Baez
Donna donna -Joan Baez-
On a wagon bound for market there's calf with mournful eye
High above him there's a swallow winging swiftly through the sky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Stop complaining! said the farmer Who told you a calf to be?
Why don't you have wings to fly with like the swallow so proud and free?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Calves are easily bound and slaughtered never knowing the reason why
But whoever treasure freedom like the swallow has learned to fly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Joan Baez-
On a wagon bound for market there's calf with mournful eye
High above him there's a swallow winging swiftly through the sky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Stop complaining! said the farmer Who told you a calf to be?
Why don't you have wings to fly with like the swallow so proud and free?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Calves are easily bound and slaughtered never knowing the reason why
But whoever treasure freedom like the swallow has learned to fly
How the winds are laughing they laugh with all their might
Laugh and laugh the whole day through and half the summer's night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na don
Saturday, April 24, 2010
소화제
소화란 음식물을 인체의 소화기관을 통과하여 가는동안 물리적, 화학적으로 분해하여 신진대사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 총과정을 말합니다. 소화의 첫걸음은 이에 의한 저작입니다. 먼저 음식물을 잘게 부수어 주는 역할을 하죠. 거기에 침에 함유된 amylase라는 효소가 전분을 분해하여 당분으로 만들어 주는 일차적화학작용을 하죠. 밥을 급히 먹거나 잘 씹지도 않고 넘기는 것은 소화불량의 최초의 원인이 될수 있습니다. 식도를 타고 위로 들어간 음식물은 강한 산이 분비되는 위에서 보다 잘게 부수어지고 (주로 단백질), 이 상태에서 4-5시간을 머물며 위의 연동으로 잘 섞어줍니다. 이렇게 잘게 부수어진 음식물이 십이지장으로 넘어가면 췌장에서 분비되는 소화효소가 섞여져 다시 화학적으로 분해를 시작합니다. 소장, 대장을 거치며 영양분이 혈관을 통하여 흡수되고 수분도 흡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죠.
소화제란 대개 이런 자연적인 소화의 기능을 도와주는 것으로 위의 활동을 도와주는 활성제, 췌장액의 소화효소와 비슷한 효소제제 (지방이나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 등의 직접적인 소화 촉진제가 있고, 한편으로 소화의 과정에 생긴 여분의 개스를 줄여주는 개스제거제와 과도한 위산의 분비를 억제하는 위산제거제 등의 간접적인 약물로 나눌수 있을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화제란 바로 위의 직접적인 소화촉진제이며 가정에서 상비약처럼 갖추어 놓는 경우가 많죠.
문제는 바로 이 두가지 종류의 소화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고기를 먹어도, 명절이 지나도 달고 사는 소화제가 정작 미국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마음놓고 과식을 하라는건지...... 미국넘덜은 워낙 소화가 잘되어 소화제가 필요없다는 건지 아니면 소식을 하는 족속인지......
미국의 약국에 가면 대개 한 진열대가 전부 잔탁, 프라일로섹 (Prilosec), 펩토비스몰, 매이록스 등의 위산억제제로 진열이 되어있습니다. 다른 종류의 소화제는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소화불량이 생기면 주로 이런 약을 구입하여 복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잔탁은 한국에서도 판매가 되고 있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것 같습니다.
그러나........이건 직접적 소화제라기 보다는 두번째 카테고리의 위산억제제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위산은 음식물 소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위의 운동이 적어져 (대개 과식) 소화가 안되는 상황인데, 일단 들어본 상표라고 잔탁을 사서 두어개 털어 넣으면 더욱 고생을 할뿐이랍니다. 속쓰릴때 먹는 겔포X처럼 알루미늄젤상의 약도 (이곳에는 빨간색 펩토비스몰이나 Maalox같은...) 마찬가지로 위산을 중화하고 위벽을 코팅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주로 위산으로 생긴 궤양등의 치료에 사용을 하지요.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단순소화불량에는 독으로 작용합니다.
한국에서 미국에 오시면 시차로 인하여 일단은 식시시간이 엉망이 되죠. 한국의 새벽시간에 저녁을 먹거나 하는 등의 몸이 미처 따르지 못하는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위가 한참 쉴시간에 기름진 음식을 밀어 넣는 결과가 생기지요. 또는 마ㄸ아히 음식이 들어와야 할 시간에 위가 텅비어 습관적으로 생긴 생체시계는 위산을 분비시키기 시작합니다. 우선, 식사조절을 정말 잘 해야 합니다. 이곳의 저녁시간에는 한동안 아주 가볍게만 먹고 일찍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주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죠 (서부기준). 그렇게 해도 역시 위산의 과도분비로 고생을 하게 되는데, 주로 증상은 명치쪽이 뻐근하게 아파오고 신물이 넘어오는듯합니다. 바로 위산에 의한 속쓰림 혹은 가슴이 타는듯한 증상이 일어나죠. 이를 heart burn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가슴이 탄다고 표현하죠. 한국에서는 그냥 위산과다 정도로 표현하는것 같습니다. 암튼, 이럴때 먹어주는 것이 바로 미국에서 파는 위장장애류의 약입니다. 한국의 소화제와는 개념이 다르니 주의하셔야 하겠죠.
소화제의 효용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 편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소화제인 효소제제의 경우 산에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개 위산억제제와 함께 먹는 경우도 있고, 효소제제를 산에 강한 물질로 감싸기도 합니다. 위산은 위에서의 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보통의 상황에서 위산을 억제한다는 건 물리적 소화를 방해하게 되는거지요. 그리고 섭취하는 소화효소의 양은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효소의 양에 비하여 훨씬 적어 그리 큰 효용을 갖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습고나적으로 먹다보면 점점 의존적이 되어 자연적인 소화효소의 분비가 줄어든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은 아닌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미국의 약국에서는 효소제제나 활명X같은 종류의 소화제를 구할수 없습니다. 한국마켓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구할수 있긴하더군요. 그러니 부득이 소화제에 의존적이신 분들은 여행이든 살러오시든 소화제 필참입니다. ㅎㅎ
암튼, 미국에선 소화는 자기자신이 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원래 그런건가요? ㅎㅎ
우선, 음식물을 꼭꼭 오래 씹어 넘기는 습관부터 시작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많지 않은 양을 오랜시간을 들여 먹는 것이 중요하죠. 옆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지수맘의 목소리로 "너나 잘하세요" ㅎㅎㅎ
식간이나 식후 바로 다량의 물을 마시는 것은 위산을 희석하는 일이되어 소화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소위 물말아 먹는 식습관도 그리 좋지 않죠. 서양의 식습관으로 식전주 (aperitif)를 들고 메인디쉬를 즐기기전 전채요리들을 살짝 먹어주는 것들은 어찌보면 위에 이젠 음식이 들어가니 시간 맞추어 위산을 분비하라는 신호 비슷한 것이 되겠습니다.
식전에 술을 많이 마신다면 당연히 좋지 않지만, 아주 살짝 식전술을 넣어주고 적은 양의 부담없는 음식물을 넣어주는 것으로 위산의 분비를 촉진할수 있습니다.
위장은 인체기관중에서 가장 스트레스에 민감한 기관이라고 하네요. 차가운 음식을 빨리 넣거나 극한 스트레스속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는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식사자리는 되도록 편안하고 밝은것이 좋겠습니다. 서로 이야기도 하고 해야 식사시간이 길어지겠죠. 전통적으로 복은 입으로 나간다는 생각때문인지 식사자리에서의 대화가 금기시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게 음식이 튈까봐 그리 매너를 지도하던 지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화라는 면에서 보면 참 좋지 않은 습관이 되겠습니다. 식사자리는 늘 밝고 웃음이 있다면 더욱 좋을것 같아요.. 아이의 성적이야기도, 남편의 외박이야기도 식탁에서는 되도록 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겠죠.
이렇게 식사를 하고 조금 지난후 아주 간단히 걷거나 설겆이를 하는등의 일상의 편안한 활동이 필요합니다. 이때 목욕을 하거나 눕거나 하는 습관은 그리 좋지 않겠죠. 전 늘 설겆이...ㅎㅎ
식사때를 놓지거나 배고픈걸 너무 심하게 참는것은 위산의 과다분비를 초래할수 있습니다. 반대로 늘 무언가를 달고 사는 군것질족의 경우도 위의 원활한 소화활동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단순히 입맛을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수 았는거죠. 규칙적인 식사습관을 기르는것이 가장 좋을것 같습니다.
다시말하면, 적당한 양의 음식을 정해진 시간에 즐겁게 섭취하고 위장의 활동을 돕도록 약간의 활동을 해주는 것으로 우리몸은 정상적인 소화활동을 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에 조금의 균열이 오면 어떤방식으로든 소화의 메카니즘에 문제가 오죠. 간혹 소화를 돕는 약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일단 소화가 되지 않는 요인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이를 제거하는 노력이 더욱 중요할것 같습니다. 다만 습관적으로 소화제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위의 활동을 무력화시킬수 있으니 습관을 고치는 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듯 하네요.
암튼, 소화불량말고도 위산과다는 언제든 생길수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위산억제제가 팔리고 있는것으로 보아도 쉽게 짐작이 갑니다. 문제는 위산과다를 소화불량으로 오인하거나 단순소화불량에 위장약을 먹는 행위되겠네요. 위산과다는 심해지면 위액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위산역류가 발생하기도 하는등 심각한 상황이 되기도 하므로 자가진단을 하지 말고 특별한 이유없이 오랜기간 위장장애를 앓는다면 의사의 진단을 받는것이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면 의례 소화기가 약해져서 그러려니 하며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위산과다로 의사에게 가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음주, 우유, 커피, 쥬스, 탄산음료, 담배를 삼가하라 합니다. 몇가지의 잘못된 믿음을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속쓰림에 우유가 좋다고 하여 마시는경우가 많습니다. 속쓰림은 대개 위산으로 인하여 생깁니다. 우유가 하얗다보니 위점막을 잘 감싸 줄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시적으로 그렇기도 하지만, 우유의 칼슘은 위산 분비를 촉진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속쓰림이나 상복부 불편감을 가중시킬수 있습니다. 위산이 더 많이 나오죠.
속이 답답하면 탄산음료를 마시면 뻥뚫린다고들 하지요. 어떠세요? 탄산음료는 위의 기능을 무력화시킬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산성이라서 위에 절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가끔 탄산음료를 마시고 억지로 트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탄산음료자체가 위와 식도를 한방향으로 막아주는 유문을 느슨하게 하여 위산역류를 유발할수 있습니다. 거기에 트림을 억지로 하면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합니다. 트림을 소화가 잘되는 지표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습관이 되면 엄청난 재앙이 될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식후불연을 죄악시하는 애연가들이 많죠. 담배의 니코틴은 위점막을 공격하는 독성물질의 분비를 촉진하여 위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프로스타글란딘의생성을 억제하여 위벽보호기능을 무력화시키는 2차적인 재앙까지 가져옵니다.
커피의 카페인은 탄산과 마찬가지로 유문의 이완을 가져오고, 위산의 분비를 촉진하기도 합니다. 커피가 가진 이로움은 많으나 많은 경우 위장에는 득이 되지 못함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습관처럼 하루에도 자판기커피를 뽑아듭니다만, 커피의 위장에의 영향도 그렇지만, 커피크림의 콜레스테롤양은 엄청 나거든요. 그러니 자판기커피를 공복에 마시는 일은 되도록 피하는것이 좋을것 같고 양도 좀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소화제란 대개 이런 자연적인 소화의 기능을 도와주는 것으로 위의 활동을 도와주는 활성제, 췌장액의 소화효소와 비슷한 효소제제 (지방이나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 등의 직접적인 소화 촉진제가 있고, 한편으로 소화의 과정에 생긴 여분의 개스를 줄여주는 개스제거제와 과도한 위산의 분비를 억제하는 위산제거제 등의 간접적인 약물로 나눌수 있을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화제란 바로 위의 직접적인 소화촉진제이며 가정에서 상비약처럼 갖추어 놓는 경우가 많죠.
문제는 바로 이 두가지 종류의 소화제,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고기를 먹어도, 명절이 지나도 달고 사는 소화제가 정작 미국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마음놓고 과식을 하라는건지...... 미국넘덜은 워낙 소화가 잘되어 소화제가 필요없다는 건지 아니면 소식을 하는 족속인지......
미국의 약국에 가면 대개 한 진열대가 전부 잔탁, 프라일로섹 (Prilosec), 펩토비스몰, 매이록스 등의 위산억제제로 진열이 되어있습니다. 다른 종류의 소화제는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소화불량이 생기면 주로 이런 약을 구입하여 복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잔탁은 한국에서도 판매가 되고 있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것 같습니다.
그러나........이건 직접적 소화제라기 보다는 두번째 카테고리의 위산억제제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위산은 음식물 소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위의 운동이 적어져 (대개 과식) 소화가 안되는 상황인데, 일단 들어본 상표라고 잔탁을 사서 두어개 털어 넣으면 더욱 고생을 할뿐이랍니다. 속쓰릴때 먹는 겔포X처럼 알루미늄젤상의 약도 (이곳에는 빨간색 펩토비스몰이나 Maalox같은...) 마찬가지로 위산을 중화하고 위벽을 코팅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주로 위산으로 생긴 궤양등의 치료에 사용을 하지요.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단순소화불량에는 독으로 작용합니다.
한국에서 미국에 오시면 시차로 인하여 일단은 식시시간이 엉망이 되죠. 한국의 새벽시간에 저녁을 먹거나 하는 등의 몸이 미처 따르지 못하는 불균형이 일어납니다. 위가 한참 쉴시간에 기름진 음식을 밀어 넣는 결과가 생기지요. 또는 마ㄸ아히 음식이 들어와야 할 시간에 위가 텅비어 습관적으로 생긴 생체시계는 위산을 분비시키기 시작합니다. 우선, 식사조절을 정말 잘 해야 합니다. 이곳의 저녁시간에는 한동안 아주 가볍게만 먹고 일찍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주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죠 (서부기준). 그렇게 해도 역시 위산의 과도분비로 고생을 하게 되는데, 주로 증상은 명치쪽이 뻐근하게 아파오고 신물이 넘어오는듯합니다. 바로 위산에 의한 속쓰림 혹은 가슴이 타는듯한 증상이 일어나죠. 이를 heart burn이라고 부릅니다. 일본에서도 가슴이 탄다고 표현하죠. 한국에서는 그냥 위산과다 정도로 표현하는것 같습니다. 암튼, 이럴때 먹어주는 것이 바로 미국에서 파는 위장장애류의 약입니다. 한국의 소화제와는 개념이 다르니 주의하셔야 하겠죠.
소화제의 효용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 편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소화제인 효소제제의 경우 산에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개 위산억제제와 함께 먹는 경우도 있고, 효소제제를 산에 강한 물질로 감싸기도 합니다. 위산은 위에서의 소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보통의 상황에서 위산을 억제한다는 건 물리적 소화를 방해하게 되는거지요. 그리고 섭취하는 소화효소의 양은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효소의 양에 비하여 훨씬 적어 그리 큰 효용을 갖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습고나적으로 먹다보면 점점 의존적이 되어 자연적인 소화효소의 분비가 줄어든다는 말도 있는데 사실은 아닌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에서든 미국의 약국에서는 효소제제나 활명X같은 종류의 소화제를 구할수 없습니다. 한국마켓이 있다면 그곳에서는 구할수 있긴하더군요. 그러니 부득이 소화제에 의존적이신 분들은 여행이든 살러오시든 소화제 필참입니다. ㅎㅎ
암튼, 미국에선 소화는 자기자신이 해야 하는 상황이 됩니다. 원래 그런건가요? ㅎㅎ
우선, 음식물을 꼭꼭 오래 씹어 넘기는 습관부터 시작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많지 않은 양을 오랜시간을 들여 먹는 것이 중요하죠. 옆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지수맘의 목소리로 "너나 잘하세요" ㅎㅎㅎ
식간이나 식후 바로 다량의 물을 마시는 것은 위산을 희석하는 일이되어 소화에 좋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소위 물말아 먹는 식습관도 그리 좋지 않죠. 서양의 식습관으로 식전주 (aperitif)를 들고 메인디쉬를 즐기기전 전채요리들을 살짝 먹어주는 것들은 어찌보면 위에 이젠 음식이 들어가니 시간 맞추어 위산을 분비하라는 신호 비슷한 것이 되겠습니다.
식전에 술을 많이 마신다면 당연히 좋지 않지만, 아주 살짝 식전술을 넣어주고 적은 양의 부담없는 음식물을 넣어주는 것으로 위산의 분비를 촉진할수 있습니다.
위장은 인체기관중에서 가장 스트레스에 민감한 기관이라고 하네요. 차가운 음식을 빨리 넣거나 극한 스트레스속에서 밥을 먹으면 체하는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식사자리는 되도록 편안하고 밝은것이 좋겠습니다. 서로 이야기도 하고 해야 식사시간이 길어지겠죠. 전통적으로 복은 입으로 나간다는 생각때문인지 식사자리에서의 대화가 금기시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게 음식이 튈까봐 그리 매너를 지도하던 지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화라는 면에서 보면 참 좋지 않은 습관이 되겠습니다. 식사자리는 늘 밝고 웃음이 있다면 더욱 좋을것 같아요.. 아이의 성적이야기도, 남편의 외박이야기도 식탁에서는 되도록 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겠죠.
이렇게 식사를 하고 조금 지난후 아주 간단히 걷거나 설겆이를 하는등의 일상의 편안한 활동이 필요합니다. 이때 목욕을 하거나 눕거나 하는 습관은 그리 좋지 않겠죠. 전 늘 설겆이...ㅎㅎ
식사때를 놓지거나 배고픈걸 너무 심하게 참는것은 위산의 과다분비를 초래할수 있습니다. 반대로 늘 무언가를 달고 사는 군것질족의 경우도 위의 원활한 소화활동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단순히 입맛을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을수 았는거죠. 규칙적인 식사습관을 기르는것이 가장 좋을것 같습니다.
다시말하면, 적당한 양의 음식을 정해진 시간에 즐겁게 섭취하고 위장의 활동을 돕도록 약간의 활동을 해주는 것으로 우리몸은 정상적인 소화활동을 하는데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규칙에 조금의 균열이 오면 어떤방식으로든 소화의 메카니즘에 문제가 오죠. 간혹 소화를 돕는 약물이 필요하긴 하지만, 일단 소화가 되지 않는 요인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이를 제거하는 노력이 더욱 중요할것 같습니다. 다만 습관적으로 소화제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위의 활동을 무력화시킬수 있으니 습관을 고치는 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을듯 하네요.
암튼, 소화불량말고도 위산과다는 언제든 생길수 있습니다. 엄청난 양의 위산억제제가 팔리고 있는것으로 보아도 쉽게 짐작이 갑니다. 문제는 위산과다를 소화불량으로 오인하거나 단순소화불량에 위장약을 먹는 행위되겠네요. 위산과다는 심해지면 위액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위산역류가 발생하기도 하는등 심각한 상황이 되기도 하므로 자가진단을 하지 말고 특별한 이유없이 오랜기간 위장장애를 앓는다면 의사의 진단을 받는것이 중요합니다. 나이가 들면 의례 소화기가 약해져서 그러려니 하며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위산과다로 의사에게 가면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음주, 우유, 커피, 쥬스, 탄산음료, 담배를 삼가하라 합니다. 몇가지의 잘못된 믿음을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속쓰림에 우유가 좋다고 하여 마시는경우가 많습니다. 속쓰림은 대개 위산으로 인하여 생깁니다. 우유가 하얗다보니 위점막을 잘 감싸 줄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시적으로 그렇기도 하지만, 우유의 칼슘은 위산 분비를 촉진하므로 결과적으로는 속쓰림이나 상복부 불편감을 가중시킬수 있습니다. 위산이 더 많이 나오죠.
속이 답답하면 탄산음료를 마시면 뻥뚫린다고들 하지요. 어떠세요? 탄산음료는 위의 기능을 무력화시킬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산성이라서 위에 절대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가끔 탄산음료를 마시고 억지로 트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탄산음료자체가 위와 식도를 한방향으로 막아주는 유문을 느슨하게 하여 위산역류를 유발할수 있습니다. 거기에 트림을 억지로 하면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합니다. 트림을 소화가 잘되는 지표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습관이 되면 엄청난 재앙이 될수 있으니 주의하시길 바랍니다.
식후불연을 죄악시하는 애연가들이 많죠. 담배의 니코틴은 위점막을 공격하는 독성물질의 분비를 촉진하여 위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프로스타글란딘의생성을 억제하여 위벽보호기능을 무력화시키는 2차적인 재앙까지 가져옵니다.
커피의 카페인은 탄산과 마찬가지로 유문의 이완을 가져오고, 위산의 분비를 촉진하기도 합니다. 커피가 가진 이로움은 많으나 많은 경우 위장에는 득이 되지 못함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그랬지만 습관처럼 하루에도 자판기커피를 뽑아듭니다만, 커피의 위장에의 영향도 그렇지만, 커피크림의 콜레스테롤양은 엄청 나거든요. 그러니 자판기커피를 공복에 마시는 일은 되도록 피하는것이 좋을것 같고 양도 좀 줄이는 것이 좋겠지요.
Friday, April 23, 2010
Are you driven by Emotion? Or Character?
April 20th, 2010 · 28 Comments
Earlier this week on Facebook and Twitter, I shared this statement from Dick Biggs:
The greatest gap in life is the one between knowing and doing.
Life would certainly be easier – and success more simple – if all it took to achieve was to KNOW the right things and DECIDE to do them, right? But I think it’s more accurate to say that a decision is just one bookend of achievement. The other is discipline. Decisions can only help us start. Discipline helps us finish.
That’s where character comes in. Emotion might drive us to make a decision. But character is what keeps us going, even when it gets hard.
In Developing the Leader Within You, I wrote about some differences between character-driven and emotion-driven people:
Character-driven people…
Do right, then feel good.
Are commitment driven.
Make principle-based decisions.
Let action control attitude.
Believe it, then see it.
Create momentum.
Ask, “What are my responsibilities?
Continue when problems arise.
Are steady.
Are leaders.
Emotion-driven people…
Feel good, then do right.
Are convenience-driven.
Make popular decisions.
Let attitude control action.
See it, then believe it.
Wait for momentum.
Ask, “What are my rights?”
Quit when problems arise.
Are moody.
Are followers.
The late Louis L’Amour is one of the best-selling authors of all time, with over 300 million copies of his popular western novels and short-story collections sold. When asked the key to his prolific writing, he responded, “Start writing, no matter what. The water does not flow until the faucet is turned on.”
_ John maxwell
April 20th, 2010 · 28 Comments
Earlier this week on Facebook and Twitter, I shared this statement from Dick Biggs:
The greatest gap in life is the one between knowing and doing.
Life would certainly be easier – and success more simple – if all it took to achieve was to KNOW the right things and DECIDE to do them, right? But I think it’s more accurate to say that a decision is just one bookend of achievement. The other is discipline. Decisions can only help us start. Discipline helps us finish.
That’s where character comes in. Emotion might drive us to make a decision. But character is what keeps us going, even when it gets hard.
In Developing the Leader Within You, I wrote about some differences between character-driven and emotion-driven people:
Character-driven people…
Do right, then feel good.
Are commitment driven.
Make principle-based decisions.
Let action control attitude.
Believe it, then see it.
Create momentum.
Ask, “What are my responsibilities?
Continue when problems arise.
Are steady.
Are leaders.
Emotion-driven people…
Feel good, then do right.
Are convenience-driven.
Make popular decisions.
Let attitude control action.
See it, then believe it.
Wait for momentum.
Ask, “What are my rights?”
Quit when problems arise.
Are moody.
Are followers.
The late Louis L’Amour is one of the best-selling authors of all time, with over 300 million copies of his popular western novels and short-story collections sold. When asked the key to his prolific writing, he responded, “Start writing, no matter what. The water does not flow until the faucet is turned on.”
_ John maxwell
Sunday, April 18, 2010
Monday, April 12, 2010
선택의 힘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김박사, ‘조혜련 효과’를 전격 해부하다
'미국 진출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미국 진출을 한다'라고 쓴다. 높은 적중률을 자랑하는 '조혜련 사전'에 따르면 그렇다. 인터뷰를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수첩에 '나도 ~을 한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한다는 '조혜련 효과'란다. 데뷔 18년차,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온 살아 있는 긍정 에너지 조혜련은 김진세 박사에게도 관심 대상 1호였다. (편집자 주)
(인터뷰 5분 전) 3월 16일 오후 6시 30분 여의도 63시티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혜련_ (김진세 박사가 들고 있는 자신의 신간 여러 권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앗! 저거 뭐야?
김진세_ 안녕하세요, 조혜련씨! 제가 오늘 인터뷰를 진행할 김진세예요.
조혜련_ (흠칫 놀라며) 아! 안녕하세요! 전 제 팬인 줄… 그런데 웬 책이 그리 많아요?
김진세_ 저희 병원 간호사들이 모두 혜련씨 팬이잖아요. 사인 받아달라고 한 권씩 샀어요.
조혜련_ 아! 이래서 책이 많이 나가는 거구나(웃음).
7남매에 다섯째, 자연스럽게 몸에 밴 자립심
김진세_ 책 내용이 정말 감명 깊었어요. 인상적이었던 건 부모님 이야기예요. 특히 아버지에 대한 부분이요. 역설적으로 보면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힘을 많이 받으셨거든요. 어떤 분들이셨나요?
조혜련_ 무능력한 아버지를 만나면서 어머니는 혼자 집안을 이끌어가야 하는 책임감이 생겼던 거예요. 애들을 팽개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아가 강해졌다고 할까요. 자존심이 강하고 뭔가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하는 분이세요. 반면 아버지는 항상 약했어요. 몸도 약하고 정신적으로도 약하고. 그런데 굉장히 다재다능한 분이셨어요. 퉁소도 불고 일본어와 중국어도 하시고….
김진세_ 아코디언 연주도 하셨다면서요?
조혜련_ 네. 아코디언, 만돌린도 다루고 그림도 그리시고요. 그런데(웃음), 정작 어디다가 내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었죠. 싸우기도 많이 싸우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안 되겠다. 우리 엄마처럼 고생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돌봄'이라는 걸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어요. 집에 들어왔는지도, 학교를 갔는지도, 도시락을 쌌는지도 모르고(웃음). 도시락 반찬이라고 해봐야 항상 유리병에 김치 담아가는 거예요.
김진세_ 아, 생각나요! 이유식 병에다가….
조혜련_ 맞아요. 그냥 김치만…. 유치원을 정말 다니고 싶었는데, 그 말을 꺼냈다가 빗자루로 두드려 맞고 포기했죠. 피아노 배우겠다고 했다가는 "우리가 부르주아냐? 말도 꺼내지 마라"고 하셔서 못 배우고. 그래서 제가 배움에 대해 굉장히 목말랐던 거 같아요. 무엇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김진세_ 어머니께서요?
조혜련_ 네. 어머니가 많이 배운 사람이라 '절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던 게 아니라, 혹시 집에 피해가 갈까봐(웃음) 자립심이 몸에 붙게끔 만들었던 거 같아요. 저는 그런 가정환경이 너무 싫었어요. 수박을 더 먹고 싶은데 애들이 많아서 제 입으로 한쪽 더 돌아오지 않는 그 집이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한번은 가출을 해서 친구 집에서 두 달을 살았어요. 걔네 집은 그 시절에 TV 리모컨이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지금도 쓴다는 얘기가 있어요(웃음).
김진세_ 한 차례 가출로 느낀 점이 있다면요?
조혜련_ 스스로 돈을 벌어야 제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콱 박힌 거 같아요. 지금도 어떻게 보면 제 장점이면서, 단점인데요. 아, 단점인 거 같은데, 지금도 남에게 의존을 못해요. 요즘 들어 하는 생각인데, 일본 갈 때도 한국 프로덕션을 등에 업고 간다거나 좀 더 편한 길이 있었을 텐데 그냥 혼자서 앞만 보고 달려갔어요. 그래서 무진장 고생하고…. 어렸을 때의 환경이 저를 많이 좌지우지한 거 같아요.
김진세_ 성격 때문이 아닐까요? 돌아가기보다는 안 돌아가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한 거 말이에요.
조혜련_ 네. 제가 판단하는 게 훨씬 편하죠.
김진세_ 언젠가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이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본인이 좌우명으로 삼은 구절을 들려주셨어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 '미래를 위해 도전하라' 그리고 '인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협력자를 두어라'라고. 협력자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지금처럼 혼자 힘으로 뭐든지 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조혜련_ 아마 어렸을 때 형성된 자아 때문일 거예요. 지금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하다가도 '이러다 사이가 나빠지는 거 아닐까? 차라리 쿨하게 혼자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협력자가 생겼어요. 제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진세_ 아!
조혜련_ 나폴레온 힐(세계적인 성공학 연구자)이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에너지가 확 떨어진다는 말을 했어요. 그만큼 협력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죠. 제 남편은 가족이 메인이에요. 가족을 중심으로 모든 게 이뤄지죠. 반대로 저는 가족은 늘 곁에 있는 거니까, 나머지를 중심에 놓고 집중했거든요.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제가 여자였던 거예요.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때문에 부부 사이가 안 좋아졌죠.
외곬 조혜련을 바로 세운 협력자, 남편
김진세_ 한 차례 위기를 겪으셨다는 얘기를 방송에서 하신 기억이 나요.
조혜련_ 남편한테 뭘 하겠다고 하면 일단 반대부터 했어요. 가장의 입장에서는 보호하려는 거였으니까요. 물론 저 혼자 결정해서 실패를 많이 하기도 했고요. 주식 해서 망하고, 땅을 샀는데 잘 안 된 것도 있고(웃음). 이러니 남편은 "네 본업 외에 다른 일은 불안하다"고 하는데, 그때는 그게 제 귀에 안 들리는 거예요. 갈등이 쌓이고 쌓여서 이혼 위기까지 갔었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제가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면요, 남편과 모든 걸 상의하기로 했어요. 그러고부터 정말 좋은 에너지가 많이 나와요.
김진세_ 작년 말, 올 초였던가요?
조혜련_ 네. 갈등을 풀기 위해 3일 밤을 새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3일 동안 계속 얘기하면, 입에서 단내가 나요(웃음). 심리학적으로 보면,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았던 거예요. 결혼을 하니 남편이 저보다 역할이 작아 보이고, 저보다 무능력한 것 같은 거예요. 저는 크~게, 글로벌하게 생각하는데, 남편은 아닌 거 같고.
김진세_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겠어요.
조혜련_ 남편이 울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조혜련 남편으로 사는 게 과연 행복할 거 같으냐? 나라는 존재는 없다. 조혜련 남편만 남고, 김현기는 사라졌어."라고. 간혹 어딘가에 터뜨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앞차가 불쑥 끼어들면, 속 시원하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순간 '조혜련 남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참아야 했던, 십 수년의 세월이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저도 눈물이 났어요. 이 사람이 진짜 어려웠구나, 많이 포기하고 많이 참았구나.
김진세_ 조혜련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요.
조혜련_ 그렇지만, 연예인이 결혼에 실패하는 것도 그 점 때문이거든요. 저도 그걸 두려워했어요. 웃음을 보여주는 사람의 불행이 알려지면, 시청자들이 제 웃음을 보기보다는 '쯧쯧쯧'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혼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계속 참아왔던 면도 있거든요. 그런데 반대의 입장에 선 남편은 더 힘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마치 환자가 치료받으러 온 거 같은데요(웃음).
김진세_ 아니에요(웃음). 혜련씨 정말 대단해요. 남편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던 문제의 원인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아내고 결국 대화를 통해 해결하신 거잖아요.
조혜련_ 해결을 했죠. 지금은 둘이 장난이 아니라니까요(웃음).
김진세_ 좋아요?
조혜련_ 엄청 좋아요. 빨리 일 마치고 남편을 만나고 싶어요. 어느 프로그램을 통해서 친해진 부부가 있는데, 그쪽은 부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이 너무 많더라고요. 얼마 전에 부부 동반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은 우리 부부를 보면서 많이 반성한대요. 아, 인생 협력자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제게는 남편이 가장 큰 버팀목이고, 협력자예요.
김진세_ 책이나 인터뷰를 보면, 혜련씨 성격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많아요.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잘 흘린다는 건 좀 의외였어요. 감성적인 면도 많으시더군요.
조혜련_ 네, 저 무지 많이 울어요.
김진세_ 그리고 '선행동 후수습', '맨땅에 헤딩하기' 이런 얘기도 있었고요. 약간 무모하지만 도전적인 성격이시죠. 그렇지만 가장 놀라웠던 표현은 '나는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다'라고 하신 거였어요. 그런 굉장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조혜련_ 저는 스티브 잡스처럼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 수 없어요. 가게 차려서 매출 따지는 것도 저랑 맞지도 않을뿐더러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원하는 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거예요. (1990년대 히트 친 프랑스 듀오의 '뉘 드 폴리'를 코믹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숑크숑크송'이 최근에 프랑스 국영 TV에 나왔잖아요? 그것도 돈이 된다기보다는, 뮤직비디오 작업하는 게 정말 재밌어서 제가 직접 투자해서 만들었어요. 얼마나 팔렸는지는 몰라요. 팔리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저 사람들이 유튜브를 보고 즐기라는 마음이었어요.
김진세_ 정말 재미있던데요.
조혜련_ 우리 사무실 직원 하나가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가는데, 제 뮤직비디오가 모니터에 떴대요. 사람들이 지하철에서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거 아시죠? 그런데 그걸 보더니 너나 할 것 없이 큭큭 웃더래요. 그게 얼마나 좋아요. 제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창조적 아이디어,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김진세_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감은 더 커지게 마련인 거죠.
조혜련_ 일본 진출만 해도 그래요. '욘사마 인기가 대단하구나.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하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발단이었요. 제가 '선행동'이라고 했잖아요? 매니저에게 "서점 좀 가자"고 해서 일단 일본어 책을 사요. 그렇게 시작이 돼요. 미국 진출을 마음먹고는 박진영씨에게 접근을 했어요(웃음). 일을 잡아달라는 게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 좀 들어보려고요. 조만간 남편과 뉴욕에 다녀오려고 해요. 가서 제가 나중에 살 건물도 좀 정해보고(웃음). 재밌잖아요? 그렇게 계기를 만드는 거죠. 제가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이유 중 하나는 아직 젊기 때문이에요. 50보다는 지금이 젊고, 50은 60보다 젊으니까요. 전 90, 100세까지 도전할 거예요. 도전하지 않으면 나태해지더라고요.
김진세_ 맞는 말씀이에요.
타고난 루저에서 눈부신 위너로
조혜련_ 듣고 읽고 쓰고 말하는 게 되니까, 이제 일본어 공부에서 손 뗄 때도 됐거든요. 방송활동하느라 바쁘니까 이제 좀 쉬자고 마음먹었더니 하염없이 놀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뭔가를 또 꾸미는 거죠. 그렇다고 돈 되는 걸 찾지는 않아요.
김진세_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채우려고 하죠. 마치 배고플 때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요. 혜련씨는 어려서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자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 말씀을 듣다 보니, 어느 정도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돈에 대한 욕심을 그리 어렵지 않게 버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혜련_ 음….
김진세_ 충분히 겪어봤고 이겨낼 수 있으니까 돈 욕심 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조혜련_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씨앗 찾기'를 해봤어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니, 나쁜 기억이 떠올랐어요. 돈 문제 때문에 친척과 부모님이 싸우는 걸 봤거든요. 그래서 돈이 싫었던 거 같아요. 돈이 있으면 항상 문제가 생기고 나태해지고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는 생각이 제 안에 있나 봐요.
김진세_ 돈은 둘째 치고, 쉬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조혜련_ 그런 생각은 없어요. 왜냐면 저는 잠을 많이 자요. 잠을 못 자면 일을 못하기 때문에 하루 7~8시간은 꼭 자요. 새벽 2~3시까지 영어공부를 하면, 9~10시까지는 눈을 붙여요. 쉬면서 집에 가만있으면 병이 나요. 에너지가 많아서 그래요.
김진세_ 책을 읽다가 놀랐던 게, '나는 루저였었다'라고 쓰셨어요. 쉽지 않은 표현이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젊은 친구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요.
조혜련_ 루저죠. 저는 여자로 태어났는데, 엄마의 태교에 의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자가 된 거예요. 태교가 그렇게 무섭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집안 내력이 팔다리가 짧아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딸까지는 괜찮은데, 다섯째부터 '갔어요'(웃음).
김진세_ 혹시 다섯째라면…?
조혜련_ 일곱 남매 중 제가 다섯째예요. 팔다리 짧지, 머리 크지, 얼굴도 우락부락하게 생겼지, 개그맨 시험을 봐도 계속 떨어지지…. 먹는 걸 좋아하니까 먹을 게 생기면 입으로 가져갔어요. 항상 부족함을 느끼니까요. 돈 생기면 과자 사먹고, 떡볶이 사먹다 보니 68kg까지 쪘어요. 중2 때부터 고3 때까지 생활기록부를 보면 1년에 8kg씩 늘었어요.
김진세_ 아휴.
조혜련_ 굴러다녔어요(웃음). 가장 큰 쇼크는 대학에 들어가서 4:4 미팅을 했는데, 제 짝이 저는 싫어하고 다른 아이를 좋아하는 거예요. 저한테 매력이 없었던 거죠.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과 친구들이 저를 빼놓고 미팅을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스케줄표에 2주마다 -2kg이라는 목표를 썼어요. 두 달이 지나면 계획상으로는 제가 원하는 몸무게가 되는 거죠. 그런데 현실은 하나도 안 변하는 거예요(웃음).
김진세_ 생각만 -2kg였다는 말씀이죠?
조혜련_ 네. 오히려 1kg이 늘었더라고요(웃음). 그걸 몇 년 동안 반복했어요. 그러다 살을 빼야겠다는 독한 결심을 한 건, 화장실에서 언뜻 이소라 언니의 다이어트 비디오 생각이 나면서였어요.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인기도 없고, 경석이한테 좋아한다고 했는데 됐다고 하고(웃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큰일이다. 소라 언니처럼 살을 빼보자.' 그래서 사람들이 담배 끊을 때 하듯이 "두 달 동안 8kg 빼겠습니다" 하고 공표를 했어요. 그리고 목표 몸무게인 51kg에 도달한 거죠. 그때 했던 운동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어요. 그때 아무도 제작을 안 해준다고 해서, 제 돈으로 만든 덕분에 다이어트 비디오로 돈을 좀 벌었죠.
가만있으면 오히려 병이 나는 에너자이저
김진세_ 루저가 위너가 되는 과정에는 첫 번째 느낀 승리감이 필요하거든요. 다이어트 비디오가 그 사례인가요?
조혜련_ 비디오도 그렇지만, 방송에 입문하면서 제 개그가 '먹히기' 시작할 때부터일 거예요. 물론 외모로는 인정을 못 받고, 여자 취급도 안 해줬지만, "웃겨! 같은 동작이라도 네가 하면 개그가 산다"라는 말로 제가 '업'된 거예요.
김진세_ 어렸을 때도 웃기셨어요?
조혜련_ 웃겼는데, 저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것도 루저인 거죠. 연기하고 싶어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는데, 다들 웃기다고 하니까요. 저는 진지하게 연기하는데, 제가 웃겨서 집중이 안 된다고들 하고.
김진세_ 최근에 일본 영화 '숲의 노래가 들린다'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셨잖아요?
조혜련_ 영화는 처음이에요. 그러니 눈물나게 감동스러운 일인 거죠.
김진세_ 그러고 보니 혜련씨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시네요.
조혜련_ 네. 피아노도 칠 줄 아니까요. 제가 마흔에 배웠거든요.
김진세_ 재밌으세요?
조혜련_ 진짜 재밌어요. 그런데 듣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더라고요.
김진세_ (웃음) 집에서는 어떠세요? 살림은 잘하세요?
조혜련_ 못해요. 살림은 전문가에게 맡겼어요.
김진세_ 살림이 취미에 안 맞아서? 아니면 시간이 부족해서?
조혜련_ 살림할 시간에 아이들하고 놀아주죠. 요즘 그런 시간이 많이 늘었어요.
김진세_ 둘째 아드님 우주는 가끔 TV에서 봐요.
조혜련_ 우주가 '붕어빵'에 출연하면서부터 많이 좋아졌어요. 엄마가 만날 바쁘다고 하는데, 방송에 나오는 분량은 짧잖아요? 자기가 방송을 해보니까, 녹화 시간이 엄청나게 긴 걸 알게 된 거죠. 남편한테도 방송을 시키는 이유가 제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좀 보여주려고요(웃음). '세바퀴'가 방송에는 1시간이 나가지만, 녹화는 5시간을 해요. 그걸 하루에 2주분, 10시간을 하거든요. 그렇게 일하고 와서 다음날 또 나가는 걸 보면서 남편이 "우리 부인은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야"라며 인정을 하는 거죠.
김진세_ 아까 '나도 결국 여자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가족을 곁에서 돌보지 못하는 면에서 미안한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조혜련_ 아니요. 왜냐면 저보다 그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있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열심히 일을 하고, 그 사람도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불편함이 없잖아요. 집에 있더라도 아이들 챙겨 먹이고 입히고 하지는 않아요. 일하시는 분께도 절대 해주지 말라고 해요.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차 문을 열어준다거나 짐을 들어준 적이 없어요. 공부도 안 시켜요. 학원 다닐 거냐고 물어보고 안 한다고 하면 그만두라고 해요. "그럼 돈 굳었다"고 하고(웃음).
김진세_ 쿨하게?
조혜련_ 쿨하게! 윤아가 유일하게 배우는 게 피아노인데, 어느 날 보니까 성의 없이 치고 있는 거예요. 바로 불렀어요. "한 달에 드는 돈이 얼만데. 피아노 그만둬?"라고 하면 "엄마 열심히 할게"라고 해요. 저는 말 한 마디면, 바로 아웃이에요.
김진세_ 많이 무서운데요?(웃음)
조혜련_ 왜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몇십 만원을 주고 피아노를 가르쳐요? 우주가 활동적이라 태권도를 재밌어 해요. 어느 날 태권도 하는 게 시들한 거
같아서 "태권도?" 했더니 "그건 합니다, 합니다" 하더라고요(웃음).
김진세_ (웃음) 아이들이 엄마를 무서워해요, 아빠를 무서워해요?
조혜련_ 저를 무서워하죠. 저는요, 제 교육법이라고 딱히 정해놓은 건 아닌데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얘기 안 하고 제가 죽어라 공부해요(웃음). "엄마 좀 놀자~"하면 "잠깐만 이 동영상 학습만 하고 놀자"고 하니까.
김진세_ 아이들이 엄마 공부하는 거 보고 배우지 않나요?
조혜련_ 그런데 오히려 반감을 사더라고요(웃음). 우주가 지난주 '붕어빵' 녹화할 때 그러더라고요. "난 엄마처럼 살기 싫어요. 그렇게 공부해야 하나요?"라고(웃음).
김진세_ 반감이라기보다, 편하게 놀고 싶은 게 아이들 마음이니까요. 혜련씨도 커가면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점이 많았듯이, 아이들도 엄마에게서 느끼는 점이 많을 거예요.
조혜련_ 아니, 저는 아이들이 열심히 안 살아도 돼요.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면 그만이에요. 만약 그렇지 않고 사회의 악이 된다면 '얄짤' 없죠. 바로 인연 끊어요(웃음).
조혜련 효과, 책임감 느껴
김진세_ 조혜련에게 행복이란?
조혜련_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은 저로 인해서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거예요.
김진세_ 아, '조혜련 효과'?
조혜련_ 네에! 어제 골프장에서 뒤팀에서 치던 아가씨를 그늘집에서 만났는데, 저를 보더니 대뜸 "언니 때문에 저 LPGA 선수가 됐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미래일기를 쓰듯이, '나는 LPGA 선수가 된다'고 썼는데, 얼마 전에 꿈이 이뤄졌대요. 팬들이 보내는 편지에서,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에서, 저를 만나면 "조혜련씨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조혜련 효과'라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어요. 불과 몇 년 전 제가 일본에 진출할 때는 단순히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산다는 생각만 했어요. 지금은 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니까 일종의 책임감도 느껴지죠.
김진세_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거든요. 정말 큰 욕구인데, 그게 만족되니 얼마나 행복하시겠어요!
조혜련_ 그러니까요.
김진세_ 그럼 여자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얼마나 만족하면서 사세요?
조혜련_ 남편이 저를 여자로 인정해주잖아요. '세바퀴'에서 제가 농담처럼 "나 섹시해. 그런데 그걸 아는 증인이 한 명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워"라고 하면 다른 출연자들이 "그 증인 한 사람한테라도 잘해라" 이러잖아요(웃음). 여자로서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안 될 거 같아요.
김진세_ 무슨 말씀인가요?
조혜련_ 무슨 얘기냐면, 제가 방송에서 여성스럽고 예쁘게 보이는 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가 작년 9월에 와다 아키코라는 유명한 MC가 진행하는 일본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2주 동안 닭가슴살, 고구마만 먹으면서 운동을 했더니 허리 사이즈가 23인치까지 줄었어요. 몸이 예술로 바뀌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누구한테 보여주겠어요? 배에는 왕(王)자가 생겼는데, 남편은 말랐다고 싫어하고(웃음). '세바퀴'에 갔더니, 다들 "어디 아프니? 무슨 일 있어?"라는 리액션을 하고(웃음).
김진세_ (웃음)
조혜련_ 지금은 5kg 쪄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아무도 몰라요, 제가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웃음). 그게 뭐냐면, 조혜련이 예뻐지든지 말든지 사람들은 상관없다는 거예요. 오프라 윈프리가 '쪘다 뺐다'를 몇 차례 했잖아요?(웃음) 누군가가 "오프라는 쪄도 오프라고, 빠져도 오프라다. 우리가 오프라에게 기대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제가 느낀 게 많아요. 조혜련에게 바라는 건 여성스러움이나 날씬함은 아닌 거 같아요.
김진세_ 그럼 대중은 무엇을 기대할까요?
조혜련_ 정말 이 시대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좋은 에너지가 아닐까요. 누구를 만나더라도 소중하게 대하면서 만들어가야 하는 거 같아요.
웰빙만 부르짖을 게 아니라 '생각의 다이어트'를!
김진세_ 공식 질문이에요. 주부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조혜련_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요, 박사님은 아실 거 같아요. 당뇨, 폐암, 무좀, 교통체증… 어때요?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죠? 이런 단어를 썼더니 우울해지더래요. 그래서 바꿨대요. 환희, 돈 10억… 이런 단어로 가득가득 채우면 삶이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해요. 이것보다 조금 더 좋은 제 방식이 있어요. 요즘은 웰빙 시대라서 식사를 할 때 칼로리가 높거나, 지방이 많은 음식은 골라내고 먹잖아요? 몸을 생각해서 먹는 건 참 많이들 가리죠. 그런데 생각은 아무렇게나 막 해요.
김진세_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말씀이에요?
조혜련_ 아니요.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생각을 막 한다고요.
김진세_ 아!
조혜련_ 사람은 하루에 1만8천 가지 생각을 한다면서요? 예를 들어 '오늘 인터뷰, 좀 아닐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고 쳐요. 스스로 이게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판단은 서잖아요? 그럼 이런 생각은 빼내자는 거죠. 전 나쁜 생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나까나'를 불러요(웃음).
김진세_ 노래를요?
조혜련_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게 차단 벽을 만드는 거죠. '숑크숑크송'도 좋고, '샤방샤방'도 좋고요. 일본 활동 시작하면서 많이 초조했어요. 생방송 앞두고는 '나는 한마디도 못할 거야'라는 불안감이 나를 완전히 장악하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럼 잠시 초조함을 잊어요. 두 달 정도 하니까 이제는 바로 나쁜 생각을 잘라버릴 수 있게 됐어요. "아, 됐어! 나는 할 수 있어"라고. 그런 훈련이 필요해요. 그럼 긍정적인 사람이 돼요.
김진세_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부정적인 생각을 차단시키는 것!
조혜련_ 되게 좋아요. 고기의 지방을 떼내고 먹듯이.
김진세_ 생각의 다이어트!
조혜련_ 생각의 다이어트? 그거 괜찮다!(웃음)
김진세_ 이런 방법도 있어요. 저도 책에서 읽은 건데 예를 들면요, 머릿속으로 '코끼리'를 그려보세요. 그럼 이젠 그 코끼리를 지워보세요. 잘 안 지워지죠? 그렇게 계속 코끼리만 떠오를 때는 빨리 '사자'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면 그걸 덮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지, '이 생각을 빨리 지워야지'라고 하면 오히려 더 나쁜 생각에 집중하게 되거든요.
조혜련_ 맞아요.
김진세_ 하지만 노래를 불러서 나쁜 생각을 끊는 것도?
조혜련_ 좋은 방법이죠.
김진세_ 직장인들이 상사한테 불려가서 혼날 때 속으로 애국가를 부른다잖아요.
조혜련_ 그쵸그쵸? 너는 떠들어라, 나는 딴 생각한다(웃음).
김진세_ 참, 혜련씨 어려서 별명이 뭐였어요?
조혜련_ '씩씩이'였어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워낙 씩씩해서 다른 의미는 너무 뚱뚱해서 숨쉴 때 씩씩댄다고(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붙여주셨어요.
김진세_ (웃음) 워낙 심리학 쪽에 관심이 많으시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별명이 그 사람 어렸을 때의 모습을 많이 반영하거든요.
조혜련_ 맞아요. 제가 지금 그렇게 씩씩하게 살잖아요.
김진세_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부터는 뭐 하세요?
조혜련_ 저도 이 인터뷰가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이에요. 이제 집에 가서 남편하고 놀아줘야죠.
김진세의 에필로그
조혜련, 현명한 선택
가난했다. 식구는 너무 많았다. 가출을 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존재감이 없었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을 7년이나 다녔다. 그리고 평생 소원인 개그맨 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졌다. 그것도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외모라서. 그래서 스스로를 루저(Loser)라고 불렀다.
그런 그녀가 잘나가는 개그우먼이 되었다.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웬만하면 그녀를 볼 수 있다. 노래와 책도 잘나간다. 게다가 6개월 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하고 일본에서도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 조혜련은 이미 매스미디어에 긍정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웠던 과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그녀는, 책에서 스스로 긍정의 힘을 찾아놓기도 했다. '여자는 대학 진학 불가'라는 집안의 반대 덕택(?)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청개구리 정신'이라든지, 아버지처럼 늘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산다는 삶에 대한 '진지함'도 긍정의 힘이기는 하다. 근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정당한 일에 대한 집념이나 부당한 일에 대한 저항이라면, 청개구리 정신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 대해 청개구리 짓을 한다면, 그저 반항일 뿐이다. 또 미안해하지 않으려 지나치게 진지하게 살다 보면, 때론 어쩔 수 없는 미안함 때문에 삶을 망친 느낌에 빠지기 쉽다. 바쁜 아내가 남편에게 미안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청개구리 정신은 끈덕지고 겸손한 에너지가 되었고, 삶에 대한 진지함은 늘 그녀를 쉬지 않고 움직이게 했으며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하게 했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를 루저로 태어나 위너(Winner)로 거듭나게 했을까?
그녀와의 이야기 속에서 해답을 찾았다. 바로 '선택의 힘'이었다. 현명한 선택 덕에 그녀는 삶의 승리자가 되어갔다. 남들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일에는 청개구리 정신으로 승부를 걸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시작하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 가끔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서운함과 미안함이 함께한 남편과 아이들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선택은 동시에 버림이다. 맛있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예쁜 사과는 없어진다. 그래서 선택은 어렵다. 자칫 잘못 하면 선택받지 못한 다른 한쪽이 없어지고 만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현명한 방향을 선택했다. 정말 운이 억세게 좋아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정도이다.
실은, 그녀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기성찰의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의 나와 10년 후의 나는 어떻게 변할 것이고 또 어떻게 변하지 않을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편과의 불화의 원인을, 유년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을 정도로, 그녀는 심리적 혜안을 갖고 있다. 자기성찰 그리고 심리적 혜안을 통해 그녀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루저는 타고나길 잘못 태어나서가 아니다. 선택을 잘못해서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알기도 전에, 너무 크게 욕심을 부리고 섣불리 포기하는 사람이 루저다. 루저와 위너,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긍정의 힘을 보태는 선물
조혜련이 선물하는 한 권의 책
「열렬하다, 내 인생!」
벌써 석 달째네요. 2월에는 「꼬마 꾸뻬, 인생을 배우다」의 작가 프랑수아 를로르가, 3월에는 돌아온 디바 박미경씨가 선물을 주셨는데, 이달에는 조혜련씨가 본인의 책을 선물로 주셨어요(작가 조혜련의 벌써 4권째 책입니다).
「열렬하다, 내 인생!」(쌤앤파커스)이라는 제목의 신간인데 참 잘 읽힙니다. 일단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녀의 긍정적인 면모가 많이 보입니다. 어려운 과거 시절, 스스로 루저라고 부르던 시절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미안하다"고 하셨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녀의 열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책입니다. 삶에 지친 주부님들이 보시면 좋은 에너지를 얻으실 듯합니다.
*김진세의 인터뷰 _ 긍정의 힘 조혜련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10분을 선정해 「열렬하다, 내 인생!」을 보내드립니다.
조혜련은…
미혼 시절에 연기한 '경석이 엄마', 남편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 '골룸' 등 데뷔 18년 차 개그우먼 조혜련의 이력은 화려하고 탄탄하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팔등신 여자 연예인들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다이어트 비디오를 내서 '대박'을 터뜨리더니, '아나까나', '가라', '숑크숑크송' 등의 히트곡을 내는 가수로도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리고 조혜련은 일본 진출 결심 6개월 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하고 일본 진출 코미디언 1호라는 성공 사례를 이뤄냈다. 개그우먼보다 먼저 꾸었던 배우의 꿈을 일본에서 이룬 조혜련은 2010년 대한민국 최고의 긍정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본인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남편, 딸, 아들까지 온 가족 이름이 함께 뜨는 스타 패밀리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파리6대학의과대학에서 메조테라피 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의 중이며, 고려제일신경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다. 「마흔의 심리학」(공저)을 쓰고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를 번역했으며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에 이어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타이틀을 더했다.
"처음 일본에 건너갈 때는 단순히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산다는
생각만 했어요. 지금은 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니까 책임감도 느껴져요"
'미국 진출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미국 진출을 한다'라고 쓴다. 높은 적중률을 자랑하는 '조혜련 사전'에 따르면 그렇다. 인터뷰를 듣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수첩에 '나도 ~을 한다'라고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요즘 유행한다는 '조혜련 효과'란다. 데뷔 18년차,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온 살아 있는 긍정 에너지 조혜련은 김진세 박사에게도 관심 대상 1호였다. (편집자 주)
(인터뷰 5분 전) 3월 16일 오후 6시 30분 여의도 63시티 엘리베이터 안에서
조혜련_ (김진세 박사가 들고 있는 자신의 신간 여러 권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앗! 저거 뭐야?
김진세_ 안녕하세요, 조혜련씨! 제가 오늘 인터뷰를 진행할 김진세예요.
조혜련_ (흠칫 놀라며) 아! 안녕하세요! 전 제 팬인 줄… 그런데 웬 책이 그리 많아요?
김진세_ 저희 병원 간호사들이 모두 혜련씨 팬이잖아요. 사인 받아달라고 한 권씩 샀어요.
조혜련_ 아! 이래서 책이 많이 나가는 거구나(웃음).
7남매에 다섯째, 자연스럽게 몸에 밴 자립심
김진세_ 책 내용이 정말 감명 깊었어요. 인상적이었던 건 부모님 이야기예요. 특히 아버지에 대한 부분이요. 역설적으로 보면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힘을 많이 받으셨거든요. 어떤 분들이셨나요?
조혜련_ 무능력한 아버지를 만나면서 어머니는 혼자 집안을 이끌어가야 하는 책임감이 생겼던 거예요. 애들을 팽개칠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아가 강해졌다고 할까요. 자존심이 강하고 뭔가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하는 분이세요. 반면 아버지는 항상 약했어요. 몸도 약하고 정신적으로도 약하고. 그런데 굉장히 다재다능한 분이셨어요. 퉁소도 불고 일본어와 중국어도 하시고….
김진세_ 아코디언 연주도 하셨다면서요?
조혜련_ 네. 아코디언, 만돌린도 다루고 그림도 그리시고요. 그런데(웃음), 정작 어디다가 내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이었죠. 싸우기도 많이 싸우셨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면 안 되겠다. 우리 엄마처럼 고생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돌봄'이라는 걸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어요. 집에 들어왔는지도, 학교를 갔는지도, 도시락을 쌌는지도 모르고(웃음). 도시락 반찬이라고 해봐야 항상 유리병에 김치 담아가는 거예요.
김진세_ 아, 생각나요! 이유식 병에다가….
조혜련_ 맞아요. 그냥 김치만…. 유치원을 정말 다니고 싶었는데, 그 말을 꺼냈다가 빗자루로 두드려 맞고 포기했죠. 피아노 배우겠다고 했다가는 "우리가 부르주아냐? 말도 꺼내지 마라"고 하셔서 못 배우고. 그래서 제가 배움에 대해 굉장히 목말랐던 거 같아요. 무엇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걸 용납하지 않으셨어요.
김진세_ 어머니께서요?
조혜련_ 네. 어머니가 많이 배운 사람이라 '절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있었던 게 아니라, 혹시 집에 피해가 갈까봐(웃음) 자립심이 몸에 붙게끔 만들었던 거 같아요. 저는 그런 가정환경이 너무 싫었어요. 수박을 더 먹고 싶은데 애들이 많아서 제 입으로 한쪽 더 돌아오지 않는 그 집이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한번은 가출을 해서 친구 집에서 두 달을 살았어요. 걔네 집은 그 시절에 TV 리모컨이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그걸 지금도 쓴다는 얘기가 있어요(웃음).
김진세_ 한 차례 가출로 느낀 점이 있다면요?
조혜련_ 스스로 돈을 벌어야 제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콱 박힌 거 같아요. 지금도 어떻게 보면 제 장점이면서, 단점인데요. 아, 단점인 거 같은데, 지금도 남에게 의존을 못해요. 요즘 들어 하는 생각인데, 일본 갈 때도 한국 프로덕션을 등에 업고 간다거나 좀 더 편한 길이 있었을 텐데 그냥 혼자서 앞만 보고 달려갔어요. 그래서 무진장 고생하고…. 어렸을 때의 환경이 저를 많이 좌지우지한 거 같아요.
김진세_ 성격 때문이 아닐까요? 돌아가기보다는 안 돌아가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한 거 말이에요.
조혜련_ 네. 제가 판단하는 게 훨씬 편하죠.
김진세_ 언젠가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이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본인이 좌우명으로 삼은 구절을 들려주셨어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라', '미래를 위해 도전하라' 그리고 '인생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협력자를 두어라'라고. 협력자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지금처럼 혼자 힘으로 뭐든지 한다는 것은 어딘가 모순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조혜련_ 아마 어렸을 때 형성된 자아 때문일 거예요. 지금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하다가도 '이러다 사이가 나빠지는 거 아닐까? 차라리 쿨하게 혼자 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지금은 협력자가 생겼어요. 제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진세_ 아!
조혜련_ 나폴레온 힐(세계적인 성공학 연구자)이 크게 성공한 사람들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에너지가 확 떨어진다는 말을 했어요. 그만큼 협력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거죠. 제 남편은 가족이 메인이에요. 가족을 중심으로 모든 게 이뤄지죠. 반대로 저는 가족은 늘 곁에 있는 거니까, 나머지를 중심에 놓고 집중했거든요. 그런데 문득 돌아보니, 제가 여자였던 거예요.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때문에 부부 사이가 안 좋아졌죠.
외곬 조혜련을 바로 세운 협력자, 남편
김진세_ 한 차례 위기를 겪으셨다는 얘기를 방송에서 하신 기억이 나요.
조혜련_ 남편한테 뭘 하겠다고 하면 일단 반대부터 했어요. 가장의 입장에서는 보호하려는 거였으니까요. 물론 저 혼자 결정해서 실패를 많이 하기도 했고요. 주식 해서 망하고, 땅을 샀는데 잘 안 된 것도 있고(웃음). 이러니 남편은 "네 본업 외에 다른 일은 불안하다"고 하는데, 그때는 그게 제 귀에 안 들리는 거예요. 갈등이 쌓이고 쌓여서 이혼 위기까지 갔었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제가 어떻게 하기로 했느냐면요, 남편과 모든 걸 상의하기로 했어요. 그러고부터 정말 좋은 에너지가 많이 나와요.
김진세_ 작년 말, 올 초였던가요?
조혜련_ 네. 갈등을 풀기 위해 3일 밤을 새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3일 동안 계속 얘기하면, 입에서 단내가 나요(웃음). 심리학적으로 보면,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았던 거예요. 결혼을 하니 남편이 저보다 역할이 작아 보이고, 저보다 무능력한 것 같은 거예요. 저는 크~게, 글로벌하게 생각하는데, 남편은 아닌 거 같고.
김진세_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겠어요.
조혜련_ 남편이 울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조혜련 남편으로 사는 게 과연 행복할 거 같으냐? 나라는 존재는 없다. 조혜련 남편만 남고, 김현기는 사라졌어."라고. 간혹 어딘가에 터뜨리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앞차가 불쑥 끼어들면, 속 시원하게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데 순간 '조혜련 남편'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참아야 했던, 십 수년의 세월이 있었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저도 눈물이 났어요. 이 사람이 진짜 어려웠구나, 많이 포기하고 많이 참았구나.
김진세_ 조혜련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건데요.
조혜련_ 그렇지만, 연예인이 결혼에 실패하는 것도 그 점 때문이거든요. 저도 그걸 두려워했어요. 웃음을 보여주는 사람의 불행이 알려지면, 시청자들이 제 웃음을 보기보다는 '쯧쯧쯧'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혼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계속 참아왔던 면도 있거든요. 그런데 반대의 입장에 선 남편은 더 힘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마치 환자가 치료받으러 온 거 같은데요(웃음).
김진세_ 아니에요(웃음). 혜련씨 정말 대단해요. 남편의 위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없었던 문제의 원인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아내고 결국 대화를 통해 해결하신 거잖아요.
조혜련_ 해결을 했죠. 지금은 둘이 장난이 아니라니까요(웃음).
김진세_ 좋아요?
조혜련_ 엄청 좋아요. 빨리 일 마치고 남편을 만나고 싶어요. 어느 프로그램을 통해서 친해진 부부가 있는데, 그쪽은 부인이 남편에 대한 불만이 너무 많더라고요. 얼마 전에 부부 동반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은 우리 부부를 보면서 많이 반성한대요. 아, 인생 협력자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제게는 남편이 가장 큰 버팀목이고, 협력자예요.
김진세_ 책이나 인터뷰를 보면, 혜련씨 성격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많아요.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잘 흘린다는 건 좀 의외였어요. 감성적인 면도 많으시더군요.
조혜련_ 네, 저 무지 많이 울어요.
김진세_ 그리고 '선행동 후수습', '맨땅에 헤딩하기' 이런 얘기도 있었고요. 약간 무모하지만 도전적인 성격이시죠. 그렇지만 가장 놀라웠던 표현은 '나는 원하는 걸 다 할 수 있다'라고 하신 거였어요. 그런 굉장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조혜련_ 저는 스티브 잡스처럼 애플이라는 회사를 만들 수 없어요. 가게 차려서 매출 따지는 것도 저랑 맞지도 않을뿐더러 제가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원하는 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거예요. (1990년대 히트 친 프랑스 듀오의 '뉘 드 폴리'를 코믹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숑크숑크송'이 최근에 프랑스 국영 TV에 나왔잖아요? 그것도 돈이 된다기보다는, 뮤직비디오 작업하는 게 정말 재밌어서 제가 직접 투자해서 만들었어요. 얼마나 팔렸는지는 몰라요. 팔리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그저 사람들이 유튜브를 보고 즐기라는 마음이었어요.
김진세_ 정말 재미있던데요.
조혜련_ 우리 사무실 직원 하나가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가는데, 제 뮤직비디오가 모니터에 떴대요. 사람들이 지하철에서는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거 아시죠? 그런데 그걸 보더니 너나 할 것 없이 큭큭 웃더래요. 그게 얼마나 좋아요. 제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제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창조적 아이디어, 그것에 집중할 수 있다는 의미예요.
김진세_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에 자신감은 더 커지게 마련인 거죠.
조혜련_ 일본 진출만 해도 그래요. '욘사마 인기가 대단하구나. 일본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하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발단이었요. 제가 '선행동'이라고 했잖아요? 매니저에게 "서점 좀 가자"고 해서 일단 일본어 책을 사요. 그렇게 시작이 돼요. 미국 진출을 마음먹고는 박진영씨에게 접근을 했어요(웃음). 일을 잡아달라는 게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 좀 들어보려고요. 조만간 남편과 뉴욕에 다녀오려고 해요. 가서 제가 나중에 살 건물도 좀 정해보고(웃음). 재밌잖아요? 그렇게 계기를 만드는 거죠. 제가 뭐든지 할 수 있을 거 같은 이유 중 하나는 아직 젊기 때문이에요. 50보다는 지금이 젊고, 50은 60보다 젊으니까요. 전 90, 100세까지 도전할 거예요. 도전하지 않으면 나태해지더라고요.
김진세_ 맞는 말씀이에요.
타고난 루저에서 눈부신 위너로
조혜련_ 듣고 읽고 쓰고 말하는 게 되니까, 이제 일본어 공부에서 손 뗄 때도 됐거든요. 방송활동하느라 바쁘니까 이제 좀 쉬자고 마음먹었더니 하염없이 놀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그래서 뭔가를 또 꾸미는 거죠. 그렇다고 돈 되는 걸 찾지는 않아요.
김진세_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채우려고 하죠. 마치 배고플 때 무언가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요. 혜련씨는 어려서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과자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어요. 지금 말씀을 듣다 보니, 어느 정도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돈에 대한 욕심을 그리 어렵지 않게 버릴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혜련_ 음….
김진세_ 충분히 겪어봤고 이겨낼 수 있으니까 돈 욕심 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조혜련_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하다가, '씨앗 찾기'를 해봤어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니, 나쁜 기억이 떠올랐어요. 돈 문제 때문에 친척과 부모님이 싸우는 걸 봤거든요. 그래서 돈이 싫었던 거 같아요. 돈이 있으면 항상 문제가 생기고 나태해지고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는 생각이 제 안에 있나 봐요.
김진세_ 돈은 둘째 치고, 쉬고 싶은 생각은 없으세요?
조혜련_ 그런 생각은 없어요. 왜냐면 저는 잠을 많이 자요. 잠을 못 자면 일을 못하기 때문에 하루 7~8시간은 꼭 자요. 새벽 2~3시까지 영어공부를 하면, 9~10시까지는 눈을 붙여요. 쉬면서 집에 가만있으면 병이 나요. 에너지가 많아서 그래요.
김진세_ 책을 읽다가 놀랐던 게, '나는 루저였었다'라고 쓰셨어요. 쉽지 않은 표현이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젊은 친구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요.
조혜련_ 루저죠. 저는 여자로 태어났는데, 엄마의 태교에 의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자가 된 거예요. 태교가 그렇게 무섭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집안 내력이 팔다리가 짧아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딸까지는 괜찮은데, 다섯째부터 '갔어요'(웃음).
김진세_ 혹시 다섯째라면…?
조혜련_ 일곱 남매 중 제가 다섯째예요. 팔다리 짧지, 머리 크지, 얼굴도 우락부락하게 생겼지, 개그맨 시험을 봐도 계속 떨어지지…. 먹는 걸 좋아하니까 먹을 게 생기면 입으로 가져갔어요. 항상 부족함을 느끼니까요. 돈 생기면 과자 사먹고, 떡볶이 사먹다 보니 68kg까지 쪘어요. 중2 때부터 고3 때까지 생활기록부를 보면 1년에 8kg씩 늘었어요.
김진세_ 아휴.
조혜련_ 굴러다녔어요(웃음). 가장 큰 쇼크는 대학에 들어가서 4:4 미팅을 했는데, 제 짝이 저는 싫어하고 다른 아이를 좋아하는 거예요. 저한테 매력이 없었던 거죠. 그때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 다음부터는 과 친구들이 저를 빼놓고 미팅을 나가더라고요. 그래서 스케줄표에 2주마다 -2kg이라는 목표를 썼어요. 두 달이 지나면 계획상으로는 제가 원하는 몸무게가 되는 거죠. 그런데 현실은 하나도 안 변하는 거예요(웃음).
김진세_ 생각만 -2kg였다는 말씀이죠?
조혜련_ 네. 오히려 1kg이 늘었더라고요(웃음). 그걸 몇 년 동안 반복했어요. 그러다 살을 빼야겠다는 독한 결심을 한 건, 화장실에서 언뜻 이소라 언니의 다이어트 비디오 생각이 나면서였어요. '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고 인기도 없고, 경석이한테 좋아한다고 했는데 됐다고 하고(웃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큰일이다. 소라 언니처럼 살을 빼보자.' 그래서 사람들이 담배 끊을 때 하듯이 "두 달 동안 8kg 빼겠습니다" 하고 공표를 했어요. 그리고 목표 몸무게인 51kg에 도달한 거죠. 그때 했던 운동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어요. 그때 아무도 제작을 안 해준다고 해서, 제 돈으로 만든 덕분에 다이어트 비디오로 돈을 좀 벌었죠.
가만있으면 오히려 병이 나는 에너자이저
김진세_ 루저가 위너가 되는 과정에는 첫 번째 느낀 승리감이 필요하거든요. 다이어트 비디오가 그 사례인가요?
조혜련_ 비디오도 그렇지만, 방송에 입문하면서 제 개그가 '먹히기' 시작할 때부터일 거예요. 물론 외모로는 인정을 못 받고, 여자 취급도 안 해줬지만, "웃겨! 같은 동작이라도 네가 하면 개그가 산다"라는 말로 제가 '업'된 거예요.
김진세_ 어렸을 때도 웃기셨어요?
조혜련_ 웃겼는데, 저는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것도 루저인 거죠. 연기하고 싶어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는데, 다들 웃기다고 하니까요. 저는 진지하게 연기하는데, 제가 웃겨서 집중이 안 된다고들 하고.
김진세_ 최근에 일본 영화 '숲의 노래가 들린다'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셨잖아요?
조혜련_ 영화는 처음이에요. 그러니 눈물나게 감동스러운 일인 거죠.
김진세_ 그러고 보니 혜련씨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시네요.
조혜련_ 네. 피아노도 칠 줄 아니까요. 제가 마흔에 배웠거든요.
김진세_ 재밌으세요?
조혜련_ 진짜 재밌어요. 그런데 듣는 사람들이 힘들어하더라고요.
김진세_ (웃음) 집에서는 어떠세요? 살림은 잘하세요?
조혜련_ 못해요. 살림은 전문가에게 맡겼어요.
김진세_ 살림이 취미에 안 맞아서? 아니면 시간이 부족해서?
조혜련_ 살림할 시간에 아이들하고 놀아주죠. 요즘 그런 시간이 많이 늘었어요.
김진세_ 둘째 아드님 우주는 가끔 TV에서 봐요.
조혜련_ 우주가 '붕어빵'에 출연하면서부터 많이 좋아졌어요. 엄마가 만날 바쁘다고 하는데, 방송에 나오는 분량은 짧잖아요? 자기가 방송을 해보니까, 녹화 시간이 엄청나게 긴 걸 알게 된 거죠. 남편한테도 방송을 시키는 이유가 제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좀 보여주려고요(웃음). '세바퀴'가 방송에는 1시간이 나가지만, 녹화는 5시간을 해요. 그걸 하루에 2주분, 10시간을 하거든요. 그렇게 일하고 와서 다음날 또 나가는 걸 보면서 남편이 "우리 부인은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야"라며 인정을 하는 거죠.
김진세_ 아까 '나도 결국 여자더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가족을 곁에서 돌보지 못하는 면에서 미안한 생각이 들지는 않아요?
조혜련_ 아니요. 왜냐면 저보다 그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있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제가 열심히 일을 하고, 그 사람도 최선을 다해서 그 일을 해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불편함이 없잖아요. 집에 있더라도 아이들 챙겨 먹이고 입히고 하지는 않아요. 일하시는 분께도 절대 해주지 말라고 해요. 단 한 번도 아이들에게 차 문을 열어준다거나 짐을 들어준 적이 없어요. 공부도 안 시켜요. 학원 다닐 거냐고 물어보고 안 한다고 하면 그만두라고 해요. "그럼 돈 굳었다"고 하고(웃음).
김진세_ 쿨하게?
조혜련_ 쿨하게! 윤아가 유일하게 배우는 게 피아노인데, 어느 날 보니까 성의 없이 치고 있는 거예요. 바로 불렀어요. "한 달에 드는 돈이 얼만데. 피아노 그만둬?"라고 하면 "엄마 열심히 할게"라고 해요. 저는 말 한 마디면, 바로 아웃이에요.
김진세_ 많이 무서운데요?(웃음)
조혜련_ 왜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몇십 만원을 주고 피아노를 가르쳐요? 우주가 활동적이라 태권도를 재밌어 해요. 어느 날 태권도 하는 게 시들한 거
같아서 "태권도?" 했더니 "그건 합니다, 합니다" 하더라고요(웃음).
김진세_ (웃음) 아이들이 엄마를 무서워해요, 아빠를 무서워해요?
조혜련_ 저를 무서워하죠. 저는요, 제 교육법이라고 딱히 정해놓은 건 아닌데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얘기 안 하고 제가 죽어라 공부해요(웃음). "엄마 좀 놀자~"하면 "잠깐만 이 동영상 학습만 하고 놀자"고 하니까.
김진세_ 아이들이 엄마 공부하는 거 보고 배우지 않나요?
조혜련_ 그런데 오히려 반감을 사더라고요(웃음). 우주가 지난주 '붕어빵' 녹화할 때 그러더라고요. "난 엄마처럼 살기 싫어요. 그렇게 공부해야 하나요?"라고(웃음).
김진세_ 반감이라기보다, 편하게 놀고 싶은 게 아이들 마음이니까요. 혜련씨도 커가면서 어머니,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점이 많았듯이, 아이들도 엄마에게서 느끼는 점이 많을 거예요.
조혜련_ 아니, 저는 아이들이 열심히 안 살아도 돼요. 이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면 그만이에요. 만약 그렇지 않고 사회의 악이 된다면 '얄짤' 없죠. 바로 인연 끊어요(웃음).
조혜련 효과, 책임감 느껴
김진세_ 조혜련에게 행복이란?
조혜련_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가장 큰 행복은 저로 인해서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거예요.
김진세_ 아, '조혜련 효과'?
조혜련_ 네에! 어제 골프장에서 뒤팀에서 치던 아가씨를 그늘집에서 만났는데, 저를 보더니 대뜸 "언니 때문에 저 LPGA 선수가 됐어요"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미래일기를 쓰듯이, '나는 LPGA 선수가 된다'고 썼는데, 얼마 전에 꿈이 이뤄졌대요. 팬들이 보내는 편지에서,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에서, 저를 만나면 "조혜련씨 파이팅!"이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조혜련 효과'라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어요. 불과 몇 년 전 제가 일본에 진출할 때는 단순히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산다는 생각만 했어요. 지금은 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니까 일종의 책임감도 느껴지죠.
김진세_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본능이거든요. 정말 큰 욕구인데, 그게 만족되니 얼마나 행복하시겠어요!
조혜련_ 그러니까요.
김진세_ 그럼 여자로서의 삶에 대해서는 얼마나 만족하면서 사세요?
조혜련_ 남편이 저를 여자로 인정해주잖아요. '세바퀴'에서 제가 농담처럼 "나 섹시해. 그런데 그걸 아는 증인이 한 명밖에 없다는 게 안타까워"라고 하면 다른 출연자들이 "그 증인 한 사람한테라도 잘해라" 이러잖아요(웃음). 여자로서의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안 될 거 같아요.
김진세_ 무슨 말씀인가요?
조혜련_ 무슨 얘기냐면, 제가 방송에서 여성스럽고 예쁘게 보이는 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제가 작년 9월에 와다 아키코라는 유명한 MC가 진행하는 일본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출연했어요. 2주 동안 닭가슴살, 고구마만 먹으면서 운동을 했더니 허리 사이즈가 23인치까지 줄었어요. 몸이 예술로 바뀌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그걸 누구한테 보여주겠어요? 배에는 왕(王)자가 생겼는데, 남편은 말랐다고 싫어하고(웃음). '세바퀴'에 갔더니, 다들 "어디 아프니? 무슨 일 있어?"라는 리액션을 하고(웃음).
김진세_ (웃음)
조혜련_ 지금은 5kg 쪄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어요. 아무도 몰라요, 제가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웃음). 그게 뭐냐면, 조혜련이 예뻐지든지 말든지 사람들은 상관없다는 거예요. 오프라 윈프리가 '쪘다 뺐다'를 몇 차례 했잖아요?(웃음) 누군가가 "오프라는 쪄도 오프라고, 빠져도 오프라다. 우리가 오프라에게 기대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제가 느낀 게 많아요. 조혜련에게 바라는 건 여성스러움이나 날씬함은 아닌 거 같아요.
김진세_ 그럼 대중은 무엇을 기대할까요?
조혜련_ 정말 이 시대에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좋은 에너지가 아닐까요. 누구를 만나더라도 소중하게 대하면서 만들어가야 하는 거 같아요.
웰빙만 부르짖을 게 아니라 '생각의 다이어트'를!
김진세_ 공식 질문이에요. 주부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긍정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조언을 해주신다면요?
조혜련_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요, 박사님은 아실 거 같아요. 당뇨, 폐암, 무좀, 교통체증… 어때요?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나죠? 이런 단어를 썼더니 우울해지더래요. 그래서 바꿨대요. 환희, 돈 10억… 이런 단어로 가득가득 채우면 삶이 긍정적으로 바뀐다고 해요. 이것보다 조금 더 좋은 제 방식이 있어요. 요즘은 웰빙 시대라서 식사를 할 때 칼로리가 높거나, 지방이 많은 음식은 골라내고 먹잖아요? 몸을 생각해서 먹는 건 참 많이들 가리죠. 그런데 생각은 아무렇게나 막 해요.
김진세_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말씀이에요?
조혜련_ 아니요.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생각을 막 한다고요.
김진세_ 아!
조혜련_ 사람은 하루에 1만8천 가지 생각을 한다면서요? 예를 들어 '오늘 인터뷰, 좀 아닐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고 쳐요. 스스로 이게 부정적인 생각이라는 판단은 서잖아요? 그럼 이런 생각은 빼내자는 거죠. 전 나쁜 생각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 '아나까나'를 불러요(웃음).
김진세_ 노래를요?
조혜련_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게 차단 벽을 만드는 거죠. '숑크숑크송'도 좋고, '샤방샤방'도 좋고요. 일본 활동 시작하면서 많이 초조했어요. 생방송 앞두고는 '나는 한마디도 못할 거야'라는 불안감이 나를 완전히 장악하더라고요. 그래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럼 잠시 초조함을 잊어요. 두 달 정도 하니까 이제는 바로 나쁜 생각을 잘라버릴 수 있게 됐어요. "아, 됐어! 나는 할 수 있어"라고. 그런 훈련이 필요해요. 그럼 긍정적인 사람이 돼요.
김진세_ 정말 좋은 생각이네요. 부정적인 생각을 차단시키는 것!
조혜련_ 되게 좋아요. 고기의 지방을 떼내고 먹듯이.
김진세_ 생각의 다이어트!
조혜련_ 생각의 다이어트? 그거 괜찮다!(웃음)
김진세_ 이런 방법도 있어요. 저도 책에서 읽은 건데 예를 들면요, 머릿속으로 '코끼리'를 그려보세요. 그럼 이젠 그 코끼리를 지워보세요. 잘 안 지워지죠? 그렇게 계속 코끼리만 떠오를 때는 빨리 '사자'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면 그걸 덮는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지, '이 생각을 빨리 지워야지'라고 하면 오히려 더 나쁜 생각에 집중하게 되거든요.
조혜련_ 맞아요.
김진세_ 하지만 노래를 불러서 나쁜 생각을 끊는 것도?
조혜련_ 좋은 방법이죠.
김진세_ 직장인들이 상사한테 불려가서 혼날 때 속으로 애국가를 부른다잖아요.
조혜련_ 그쵸그쵸? 너는 떠들어라, 나는 딴 생각한다(웃음).
김진세_ 참, 혜련씨 어려서 별명이 뭐였어요?
조혜련_ '씩씩이'였어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워낙 씩씩해서 다른 의미는 너무 뚱뚱해서 숨쉴 때 씩씩댄다고(웃음).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붙여주셨어요.
김진세_ (웃음) 워낙 심리학 쪽에 관심이 많으시니까 드리는 말씀인데, 별명이 그 사람 어렸을 때의 모습을 많이 반영하거든요.
조혜련_ 맞아요. 제가 지금 그렇게 씩씩하게 살잖아요.
김진세_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이제부터는 뭐 하세요?
조혜련_ 저도 이 인터뷰가 오늘의 마지막 스케줄이에요. 이제 집에 가서 남편하고 놀아줘야죠.
김진세의 에필로그
조혜련, 현명한 선택
가난했다. 식구는 너무 많았다. 가출을 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존재감이 없었다. 등록금이 없어서 대학을 7년이나 다녔다. 그리고 평생 소원인 개그맨 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졌다. 그것도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외모라서. 그래서 스스로를 루저(Loser)라고 불렀다.
그런 그녀가 잘나가는 개그우먼이 되었다.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웬만하면 그녀를 볼 수 있다. 노래와 책도 잘나간다. 게다가 6개월 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하고 일본에서도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 조혜련은 이미 매스미디어에 긍정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웠던 과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한 그녀는, 책에서 스스로 긍정의 힘을 찾아놓기도 했다. '여자는 대학 진학 불가'라는 집안의 반대 덕택(?)에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청개구리 정신'이라든지, 아버지처럼 늘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산다는 삶에 대한 '진지함'도 긍정의 힘이기는 하다. 근데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정당한 일에 대한 집념이나 부당한 일에 대한 저항이라면, 청개구리 정신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 대해 청개구리 짓을 한다면, 그저 반항일 뿐이다. 또 미안해하지 않으려 지나치게 진지하게 살다 보면, 때론 어쩔 수 없는 미안함 때문에 삶을 망친 느낌에 빠지기 쉽다. 바쁜 아내가 남편에게 미안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청개구리 정신은 끈덕지고 겸손한 에너지가 되었고, 삶에 대한 진지함은 늘 그녀를 쉬지 않고 움직이게 했으며 하는 일마다 최선을 다하게 했다. 무엇일까? 무엇이 그녀를 루저로 태어나 위너(Winner)로 거듭나게 했을까?
그녀와의 이야기 속에서 해답을 찾았다. 바로 '선택의 힘'이었다. 현명한 선택 덕에 그녀는 삶의 승리자가 되어갔다. 남들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스스로 잘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일에는 청개구리 정신으로 승부를 걸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시작하는 일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최선을 다할 뿐만 아니라, 미안하지 않기 위해서 가끔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서운함과 미안함이 함께한 남편과 아이들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진정한 승리자가 되었다.
선택은 동시에 버림이다. 맛있는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예쁜 사과는 없어진다. 그래서 선택은 어렵다. 자칫 잘못 하면 선택받지 못한 다른 한쪽이 없어지고 만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현명한 방향을 선택했다. 정말 운이 억세게 좋아서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정도이다.
실은, 그녀가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기성찰의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지금의 나와 10년 후의 나는 어떻게 변할 것이고 또 어떻게 변하지 않을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남편과의 불화의 원인을, 유년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을 정도로, 그녀는 심리적 혜안을 갖고 있다. 자기성찰 그리고 심리적 혜안을 통해 그녀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루저는 타고나길 잘못 태어나서가 아니다. 선택을 잘못해서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제대로 자기 자신을 알기도 전에, 너무 크게 욕심을 부리고 섣불리 포기하는 사람이 루저다. 루저와 위너,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긍정의 힘을 보태는 선물
조혜련이 선물하는 한 권의 책
「열렬하다, 내 인생!」
벌써 석 달째네요. 2월에는 「꼬마 꾸뻬, 인생을 배우다」의 작가 프랑수아 를로르가, 3월에는 돌아온 디바 박미경씨가 선물을 주셨는데, 이달에는 조혜련씨가 본인의 책을 선물로 주셨어요(작가 조혜련의 벌써 4권째 책입니다).
「열렬하다, 내 인생!」(쌤앤파커스)이라는 제목의 신간인데 참 잘 읽힙니다. 일단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녀의 긍정적인 면모가 많이 보입니다. 어려운 과거 시절, 스스로 루저라고 부르던 시절의 이야기는 감동적입니다. 아버지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미안하다"고 하셨다는 대목에서는 살짝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그녀의 열정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책입니다. 삶에 지친 주부님들이 보시면 좋은 에너지를 얻으실 듯합니다.
*김진세의 인터뷰 _ 긍정의 힘 조혜련 편을 읽고 애독자 엽서에 소감을 적어 보내주시는 독자 중 10분을 선정해 「열렬하다, 내 인생!」을 보내드립니다.
조혜련은…
미혼 시절에 연기한 '경석이 엄마', 남편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 '골룸' 등 데뷔 18년 차 개그우먼 조혜련의 이력은 화려하고 탄탄하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팔등신 여자 연예인들의 전유물인 줄로만 알았던 다이어트 비디오를 내서 '대박'을 터뜨리더니, '아나까나', '가라', '숑크숑크송' 등의 히트곡을 내는 가수로도 쏠쏠한 재미를 봤다. 그리고 조혜련은 일본 진출 결심 6개월 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하고 일본 진출 코미디언 1호라는 성공 사례를 이뤄냈다. 개그우먼보다 먼저 꾸었던 배우의 꿈을 일본에서 이룬 조혜련은 2010년 대한민국 최고의 긍정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본인의 이름을 검색창에 치면 남편, 딸, 아들까지 온 가족 이름이 함께 뜨는 스타 패밀리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김진세 박사는…
여자보다 더 여자 마음을 잘 아는 여성 심리 전문가로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 파리6대학의과대학에서 메조테라피 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고려대에서 강의 중이며, 고려제일신경정신과에서 일상의 스트레스에 지친 이들을 위한 상담을 하고 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그의 또 다른 재주는 글쓰기. 다년간 여러 매체에 메디컬 칼럼을 써왔다. 「마흔의 심리학」(공저)을 쓰고 「뜨겁게 사랑하거나 쿨하게 떠나거나」를 번역했으며 고민 많은 20대 여성에게 보내는 세심한 위로를 담은 「심리학 초콜릿」에 이어 행복한 시작을 위한 심리학 처방 「스타트 신드롬」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타이틀을 더했다.
"처음 일본에 건너갈 때는 단순히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산다는
생각만 했어요. 지금은 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니까 책임감도 느껴져요"
Saturday, April 10, 2010
가장 흔한 이혼 사유는 '성격차이'? 아니라네
"난 정말 죽겠어. 이렇게 살려고 결혼한 게 아닌데.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이혼해버리고 혼자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남편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
그 남자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면서 결혼한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지금은 그 남자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신혼 초부터 크고 작은 일로 부딪치기 시작한 부부는 결혼 2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는 신경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힘든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도무지 자신들의 부부관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그들 부부. 미워하고 증오하는 단계를 넘어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단계로 접어든 이들 부부는 요즘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서로를 그림자처럼 대하며 투명인간 놀이에 빠져 있다. 가트맨 방식으로 말하자면 비난, 경멸, 방어, 담 쌓기 등 결혼의 위험 요소 4가지가 극대화 된 상태인 것이다.
결혼의 위험 4요소 '비난, 경멸, 방어, 담 쌓기'
세계적 부부관계전문가 가트맨 부부의 내한 소식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혹시라도 이 부부의 문제(혹은 우리 부부의 문제) 해결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MIT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였던 가트맨 박사가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0대 초반. 당시 사귀던 여성들과의 관계가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났고 결혼마저도 실패로 끝나게 되자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관계'라는 것에 대한 비밀을 풀고자 과학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 친구관계, 동료관계 등 모든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고 유지하고 성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과 행복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에서 시작한 가트맨의 연구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 실제로 미국사회의 이혼률을 줄이고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비용까지 절감하는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또한 OECD국가 가운데 이혼율 1위라는 우리 나라에도 적용되어 바람직한 효과를 내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잘못된 싸움 방식이 '이혼'에 이르게 한다
가트맨은 1970년대부터 워싱턴대학의 러브랩(Love lab)이라는 공간에서 부부들의 상호작용을 24시간 비디오로 촬영, 관찰하며 상황에 따른 심장박동수와 혈류량, 땀이나 소변 속의 스트레스 호르몬 양을 측정해 부부간의 상호작용이 인체에 미치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자료를 얻어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실험에 참여했던 부부들의 5년 후, 10년 후, 15년 후를 지속적으로 추적하며 연구한 결과 놀랍게도 이혼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혼 사유가 흔히 말하는 '성격차이' 때문이 아닌 '부부 싸움의 방식'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격차이, 학력, 직업, 수입, 외도, 폭력, 음주, 돈, 고부갈등 등의 요인은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부부를 불행하게 만들고 이혼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잘못된 싸움 방식, 부정적인 싸움의 방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가트맨 박사는 드러나는 문제가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부부 관계를 망치는 것을 비난, 경멸, 방어, 담 쌓기의 4가지 요소에서 찾았다. 이런 식의 부부싸움이 계속되면 결국은 '못 살겠다', '헤어지자'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 어느 날엔가는 이혼이라는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심'과 '반응'이 없는 부부가 헤어지기 쉬워
상호관계에 세계적 권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트맨 박사에게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관계가 있을까? 지금은 모든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달인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생긴 웃지 못할 불편한 관계도 있다고 한다.
"지난 36년간 300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부부상호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연구를 하다 보니 그 결과 어느 부부든 단 15분 정도 일상적인 대화만 경청해보면 (그 부부가) 이혼할 부부인지의 여부를 95% 정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겼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의 불안한 부부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은 지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조차 꺼려하지요. 그래서 요즘은 조금 서운하기까지 합니다."
15분 만에 부부의 위기를 진단해 낸다? 쉽게 믿어지지 않는 말이지만 명백한 사실이란다. 그에게 부부의 어떤 면을 보고 그들의 위기를 감지 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대답대신 아내인 줄리 가트맨 여사가 남편과 함께 짧은 상황극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아내 : "여보, 창밖이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저 밖에 보트가 있네요."
남편 : "......." (못 들은 척, 혹은 묵묵부답)
가트맨 박사가 일상적인 부부의 모습 속에서 이혼을 예측하는 기준은 관심과 반응이다. 부부가 서로의 말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면 이혼에 이르게 될 부부인지 아닌지를 쉽게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트맨 박사는 "갈등이 있어도 싸우지 않는 부부와 대화가 없어 서로의 꿈을 나누지 않는 부부 역시 이혼으로 향할 수 있는 불행한 부부"라며 "이런 위기를 예방하려면 부부 간에 대화가 우선 되어야 하며 서로 각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각자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 이에 대해 호감, 존중, 이해,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을 '자주' 실천하는 것 즉, 조금씩 자주 하라(Small things often)를 강조한다. 돈을 얼마나 들였느냐, 얼마나 새롭고 거창한 것을 하느냐보다 작은 표현이라도 얼마나 자주하느냐에 행복한 결혼의 성패가 달렸다는 것이다.
지난 8일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렸던 가트맨 박사의 기자간담회가 끝나자마자 친구 집으로 달려가 가트맨의 부부관계 솔루션을 들려주었다. 물론 어찌보면 간단할 수도 있는 행동들이 적지 않는 시간동안 냉각되어 온 친구부부의 관계를 단시간 내에 좋아지게 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겪는 위기의 원인이 실제로 변화되기 쉽지 않은 성격차이나 돈 문제가 아닌 '부부 싸움의 방식'이었다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관계변화에 큰 동기부여가 될 것임을 알기에 그들 부부의 바람직한 변화를 기대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난 정말 죽겠어. 이렇게 살려고 결혼한 게 아닌데.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이혼해버리고 혼자 사는 게 나을 것 같아. 남편이 아니라 웬수야. 웬수."
그 남자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면서 결혼한 친구가 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지금은 그 남자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한다. 신혼 초부터 크고 작은 일로 부딪치기 시작한 부부는 결혼 2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네가 잘했느니 내가 잘했느니' 하는 신경전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힘든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도무지 자신들의 부부관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그들 부부. 미워하고 증오하는 단계를 넘어서 서로에게 무관심한 단계로 접어든 이들 부부는 요즘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서로를 그림자처럼 대하며 투명인간 놀이에 빠져 있다. 가트맨 방식으로 말하자면 비난, 경멸, 방어, 담 쌓기 등 결혼의 위험 요소 4가지가 극대화 된 상태인 것이다.
결혼의 위험 4요소 '비난, 경멸, 방어, 담 쌓기'
세계적 부부관계전문가 가트맨 부부의 내한 소식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혹시라도 이 부부의 문제(혹은 우리 부부의 문제) 해결에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MIT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였던 가트맨 박사가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0대 초반. 당시 사귀던 여성들과의 관계가 대부분 좋지 않게 끝났고 결혼마저도 실패로 끝나게 되자 자신을 불행하게 했던 '관계'라는 것에 대한 비밀을 풀고자 과학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 친구관계, 동료관계 등 모든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발전시키고 유지하고 성장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들과 행복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에서 시작한 가트맨의 연구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 실제로 미국사회의 이혼률을 줄이고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비용까지 절감하는 놀라운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또한 OECD국가 가운데 이혼율 1위라는 우리 나라에도 적용되어 바람직한 효과를 내지 않을까 기대가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잘못된 싸움 방식이 '이혼'에 이르게 한다
가트맨은 1970년대부터 워싱턴대학의 러브랩(Love lab)이라는 공간에서 부부들의 상호작용을 24시간 비디오로 촬영, 관찰하며 상황에 따른 심장박동수와 혈류량, 땀이나 소변 속의 스트레스 호르몬 양을 측정해 부부간의 상호작용이 인체에 미치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자료를 얻어냈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실험에 참여했던 부부들의 5년 후, 10년 후, 15년 후를 지속적으로 추적하며 연구한 결과 놀랍게도 이혼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이혼 사유가 흔히 말하는 '성격차이' 때문이 아닌 '부부 싸움의 방식' 때문이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격차이, 학력, 직업, 수입, 외도, 폭력, 음주, 돈, 고부갈등 등의 요인은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며 실제로 부부를 불행하게 만들고 이혼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잘못된 싸움 방식, 부정적인 싸움의 방식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가트맨 박사는 드러나는 문제가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부부 관계를 망치는 것을 비난, 경멸, 방어, 담 쌓기의 4가지 요소에서 찾았다. 이런 식의 부부싸움이 계속되면 결국은 '못 살겠다', '헤어지자'라는 말이 나오게 되고 어느 날엔가는 이혼이라는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관심'과 '반응'이 없는 부부가 헤어지기 쉬워
상호관계에 세계적 권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트맨 박사에게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관계가 있을까? 지금은 모든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달인이 되었지만 그 때문에 생긴 웃지 못할 불편한 관계도 있다고 한다.
"지난 36년간 300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부부상호관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연구를 하다 보니 그 결과 어느 부부든 단 15분 정도 일상적인 대화만 경청해보면 (그 부부가) 이혼할 부부인지의 여부를 95% 정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판단력이 생겼습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의 불안한 부부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은 지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조차 꺼려하지요. 그래서 요즘은 조금 서운하기까지 합니다."
15분 만에 부부의 위기를 진단해 낸다? 쉽게 믿어지지 않는 말이지만 명백한 사실이란다. 그에게 부부의 어떤 면을 보고 그들의 위기를 감지 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 보았다. 대답대신 아내인 줄리 가트맨 여사가 남편과 함께 짧은 상황극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아내 : "여보, 창밖이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저 밖에 보트가 있네요."
남편 : "......." (못 들은 척, 혹은 묵묵부답)
가트맨 박사가 일상적인 부부의 모습 속에서 이혼을 예측하는 기준은 관심과 반응이다. 부부가 서로의 말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면 이혼에 이르게 될 부부인지 아닌지를 쉽게 판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트맨 박사는 "갈등이 있어도 싸우지 않는 부부와 대화가 없어 서로의 꿈을 나누지 않는 부부 역시 이혼으로 향할 수 있는 불행한 부부"라며 "이런 위기를 예방하려면 부부 간에 대화가 우선 되어야 하며 서로 각자가 누구인지를 묻고, 각자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알아 이에 대해 호감, 존중, 이해,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을 '자주' 실천하는 것 즉, 조금씩 자주 하라(Small things often)를 강조한다. 돈을 얼마나 들였느냐, 얼마나 새롭고 거창한 것을 하느냐보다 작은 표현이라도 얼마나 자주하느냐에 행복한 결혼의 성패가 달렸다는 것이다.
지난 8일 서울 중구 밀레니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렸던 가트맨 박사의 기자간담회가 끝나자마자 친구 집으로 달려가 가트맨의 부부관계 솔루션을 들려주었다. 물론 어찌보면 간단할 수도 있는 행동들이 적지 않는 시간동안 냉각되어 온 친구부부의 관계를 단시간 내에 좋아지게 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겪는 위기의 원인이 실제로 변화되기 쉽지 않은 성격차이나 돈 문제가 아닌 '부부 싸움의 방식'이었다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관계변화에 큰 동기부여가 될 것임을 알기에 그들 부부의 바람직한 변화를 기대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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