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y 30, 2009
Friday, May 29, 2009
인쇄청렴의 역설

게시물 인쇄청렴의 역설
골룸 2009-05-30 02:57:41 주소복사 조회 0 스크랩 0
노무현은 청렴한 대통령이었다.
역사적으로 이런 청렴한 대통령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 청렴함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한겨레21 기사에 이런 말이 있더라.
비도덕적 정치인에게는 도덕을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도덕의 잣대를 높여놓은 도덕적 인간에게는 끝없이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국가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냐.
역설이다.
자신의 강점이 약점으로 연결된다.
보통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노무현은 강점이 타격을 당해 화를 입었다.
이런 방법은 좀처럼 통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강점을 공략하려 들면 오히려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명박은 노무현의 강점을 타격했다.
그것은 권력의 힘을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수사권력, 감찰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앞으로도 노무현처럼 청렴한 대통령은 나오기 힘들다.
그 청렴한 대통령을 죽임으로써 우리는 어떤 공식을 만들었다.
더러운 정치판의 똥구덩이에서 저홀로 깨끗하면 질투의 화를 입는다는 것.
그리고 그 고단한 상황 속에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
출처 | 노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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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 ... 서울광장 사회 진행때
김제동 ... 서울광장 사회 진행때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하셨지만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크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하셨지만 우리가 기꺼이 나눠드려야겠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좀 슬퍼해야겠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심장이 뛸 때마다 잊지 않겠다
미안해하지 말랐는데 좀 미안해하겠다. 지켜드리지 못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랬는데 스스로를 원망하겠다
운명이라 하셨는데 이 운명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작은 비석만 남기라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큰 비석 잊지 않고 세우겠다
마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그 분을, 우리 가슴 속에 한 줌의 재가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있는 열정으로 대하겠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하셨지만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크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하셨지만 우리가 기꺼이 나눠드려야겠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좀 슬퍼해야겠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심장이 뛸 때마다 잊지 않겠다
미안해하지 말랐는데 좀 미안해하겠다. 지켜드리지 못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랬는데 스스로를 원망하겠다
운명이라 하셨는데 이 운명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작은 비석만 남기라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큰 비석 잊지 않고 세우겠다
마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그 분을, 우리 가슴 속에 한 줌의 재가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있는 열정으로 대하겠다
김대중 오열, 영결식서 유가족 손 맞잡고 울음

김대중 오열, 영결식서 유가족 손 맞잡고 울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영결식서 헌화한 뒤 유족들에게 위로를 전하다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29일 서울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김영삼·김대중 두 전대통령은 장의집행위원회 고문 자격으로 참석해 절차에 따라 조사가 끝난 뒤 각각 세번째와 네번째로 헌화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헌화를 위해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국화꽃을 가지고 영정 앞에 헌화한 뒤 돌아온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헌화한 뒤 유족이 있는 귀빈석을 향했다. 유족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의 손을 맞잡고 마침내 오열했다.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권 여사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통곡에 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 노건호씨도 마찬가지. 민주화를 위해 같은 길을 걸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음이 깊이 전달되는 듯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23일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직후 "평생 민주화 동지를 잃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진 심정"이라며 애통함을 드러냈다. 지난 28일에는 서울역에 마련된 분향소를 직접 찾기도 했다고 전해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노 전 대통령을 정계에 입문시킨 인물로 인연이 김대중 전 대통령 못지않다. 그러나 지난 1990년 노 전 대통령이 3당 합당에 반대하며 탈당하면서 두 전직 대통령은 다른길을 걷게된바 있다.
한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로 노 전 대통령 영결식에 불참했다. (사진=연합뉴스)
노희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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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 ... 서울광장 사회 진행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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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하셨지만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크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하셨지만 우리가 기꺼이 나눠드려야겠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좀 슬퍼해야겠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심장이 뛸 때마다 잊지 않겠다
미안해하지 말랐는데 좀 미안해하겠다. 지켜드리지 못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랬는데 스스로를 원망하겠다
운명이라 하셨는데 이 운명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작은 비석만 남기라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큰 비석 잊지 않고 세우겠다
마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그 분을, 우리 가슴 속에 한 줌의 재가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있는 열정으로 대하겠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하셨지만 그 분에게 받은 사랑이 크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하셨지만 우리가 기꺼이 나눠드려야겠다.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오늘은 좀 슬퍼해야겠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고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심장이 뛸 때마다 잊지 않겠다
미안해하지 말랐는데 좀 미안해하겠다. 지켜드리지 못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랬는데 스스로를 원망하겠다
운명이라 하셨는데 이 운명만큼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작은 비석만 남기라 하셨는데 우리 가슴 속에 잊혀지지 않는 큰 비석 잊지 않고 세우겠다
마음의 뜨거운 열정으로 그 분을, 우리 가슴 속에 한 줌의 재가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있는 열정으로 대하겠다
프라다괜히 악마가 를?

프라다괜히 악마가 를?
[한겨레21] [진중권과 정재승의 크로스 ⑪ 프라다]
괜히 악마가 프라다를?
'명품'의 일반론을 비껴난 일하는 여성을 위한 미니멀리즘… 현대 워킹우먼들도 이제 '개털 될' 차례
■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요즘은 남자들도 패션에 신경을 쓴다고 하나, 그것도 루키즘에 익숙한 신세대의 얘기. 젊은 시절을 도로에서 돌 던지며 보냈던 구세대는 여전히 몸치장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옷차림만으로는 도저히 덮어버릴 수 없는 열악한 신체적 바탕에 대한 자기 인식, 흔히 '주제 파악'이라 부르는 이 특정한 인식론적 태도에서 패션엔 관심을 끊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패션과 결부되어 있는 상류계급의 이미지도 좌파의 정치적 입장에는 왠지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런 내가 '프라다'라는 말을 들은 것은 딱 두 번, LG에서 신제품으로 내놓은 '프라다폰'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영화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를 통해서였다.
좌파 페미니스트 미우치아 프라다 덕에
명품을 대하는 먹물의 전형적 태도는 그것을 이른바 신분의 상징(status symbol)으로 읽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소스타인 베블런은 < 유한계급론 > 에서 미국 상류계층의 소비행태에서 기존의 경제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성을 발견한다. 즉, 값이 쌀수록 많이 사는 일반인과 달리 상류층은 외려 값이 비쌀수록 많이 산다는 것. 그것은 물론 상품을 사용가치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신분 과시를 위한 일종의 기호로 소비하기 하기 때문이리라. 이른바 '명품'은 유한계급이 자신을 하류층과 구별하는 기호적 행위의 매체다. 하지만 프라다는 이런 일반론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아니, 프라다의 인기는 그 일반론을 슬쩍 비껴간 데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가죽 제품을 만들던 프라다가 일약 세계적 브랜드로 떠오른 것은 창업자의 손녀인 미우치아 프라다의 덕. 그는 원래 패션과 별 관련이 없었고, 밀라노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좌파 페미니스트였다. 디자이너로서 그의 이름을 알린 히트작은 포코노(pocono)로 만든 토트백(1985년). 포코노는 조직이 아주 가늘어 질기면서도 실크처럼 섬세하다고 한다. 명품이라고 하면 가죽이나 실크와 같은 고급스런 천연소재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미우치아는 명품 제작에 군대의 텐트나 낙하산에나 쓰이는 나일론을 사용했다. 오늘날 블랙 나일론은 프라다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나, 당시로서 이는 충격적인 발상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던 미니멀리즘의 디자인을 택한 것도 적절한 선택이었다. 가방의 디자인이 복잡할수록, 다른 요소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운 법. 하지만 간략한 미니멀리즘의 디자인은 어느 옷에나 쉽게 어울린다. 이 미니멀리즘의 디자인이 블랙 나일론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프라다 특유의 '실용성'을 만들어냈다. "아이를 기르며 직장에 다니는 여자라면 거울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 섹시해야지 생각하는 여자도 거의 없다. 숱한 디자이너들이 여성의 섹시함을 강조하지만, 실제 상황은 다르다." 일반적으로 '명품'이라 하면 유한계급의 것이나, 미우치아는 이렇게 일하는 여성의 미학(feminin worker aesthetic)을 구현했다.
'일하는 여성의 미학'은 아마도 패션 디자인과 좌파 페미니즘의 자연스러운 결합에서 나온 것이리라. 튀지 않고 평범하나 어딘가 고급스럽고 세련되게 느껴지는 옷. 소수의 특별한 여성이 아닌 다수의 보통 여자들을 위한 옷. 한가롭게 섹시함이나 뽐내며 빈둥거리는 여자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꽤 안정된 생활을 하는 커리어우먼들을 위한 옷. 이 디자인의 원칙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때, 그 '일하는 여성'이란 물론 그 누구에 앞서 우선 미우치아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근무복'(uniform)이라 불렀다고 한다.
대중화해봤자 명품은 여전히 명품
"물론 아주 비싼 가격에 그저 10명, 100명만 누리는 제품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달라요. 명품이면서도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국가에서 향유되기를 저는 희망합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국가에서 접근 가능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요. 저희는 아름답고 품질이 탁월한 제품을 만들어 너무 비싼 가격이 아닌, 적절한 가격에 제공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초고가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비싼 가격으로 매출액을 올린다든지, 또 그런 초고가 제품을 어느 정도 판매한 뒤에는 중저가 제품을 내놓아 매출을 높인다든지 하는 식으로 가격 정책을 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국내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우치아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고전적 명품의 관념을 가진 사람에게는 '다수를 위한 명품'이란 말 자체가 아마 형용모순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미우치아는 자신의 별명을 딴 기성복(pret a porter) 미우미우(MiuMiu)를 통해 이 대중화 전략을 아직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10대와 20대로까지 확대했다. 미우치아에게 남아 있는 좌파 페미니즘의 흔적은 명품 소비를 이렇게 소수의 유한계급이 아닌 다수의 노동계급(?)으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대중화해봤자 명품은 여전히 명품,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다. 젊은 시절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미우치아는 명품 옷을 걸치고 정치적 시위에 나갔다가 주위의 눈총을 사곤 했단다. 이 일화 속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삐딱한 시선도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진보신당 게시판에 들어가 당원들에게 프라다에 관한 견해를 묻자, 역시 좌파 페미니스트인 '오필리어'라는 필명의 여성 동지가 남성당원에게 점령된 당 게시판의 상황에 불만을 표하며 여성 전용 토론방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다 말고, '프라다의 추억?'이란 제목의 글을 답글로 남겼다. 필이 팍 와서 꽂히는 명문이라 필자의 허락을 받아 그대로 옮긴다.
"프라다 얘기 나오니까 프라다 비닐백 보고 으악 하고 충격받았던 기억이 난다. 온통 투명한 비닐백과 그 안에 든 노트, MP3, 콘돔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던 비닐백 광고사진. 문제는 그 별것도 아닌 비닐백이 무지 비쌌다는 것이다. 다른 브랜드, 샤넬이나 디오르, 에르메스가 모피·가죽·보석·실크 등을 동원한 최고급 재질로 물건을 만들어낸 데 반해 프라다는 보통 기성복에 쓰이는 재료를 가지고 물건을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에르메스 백에는 다이아몬드나 박혀 있지, 프라다는 비닐이었단 말이다. 비닐… 그야말로 순수하게 디자인 그 자체에만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샤넬, 디오르 등은 상류층 40~50대의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박혀 있어 젊은 여성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특히 중산층의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명품 브랜드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프라다의 등장으로 현대 워킹우먼들도 이제 '개털 될' 차례가 된 것이다. 이전까지 명품 브랜드란 상류층들의 기호품 정도로 취급받았지만 프라다는 그 시장을 중산층에까지 확장시킨 사례가 되었다. 프라다의 대박 뒤에는 중산층 여성들의 수없이 털린 지갑들이 즐비한 것이다(사실 말이 프라다지, 그 월급 갖고 지를 여유가 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다들 버는 사정 거기서 거긴데).
10대 소녀들의 호주머니도 탐낸다
프라다는 비교적 새롭게 떠오른 브랜드에 속한다. 전통적인 브랜드 외에도 새로운 명품 브랜드를 론칭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패션업계에서는 계속 신진 브랜드를 성공시키는데, 베라 왕이나 지미 추가 그에 속한다. 문제는 이들이 상류층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지갑도 노린다는 것이고, 10대 소녀들의 호주머니도 탐내고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갑이 얇은 중산층 젊은이들을 겨냥해 명품 브랜드를 성공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프라다가 처음 열어젖힌 셈이다. 통장이고 카드고 막 털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괜히 악마가 프라다를 입는 게 아니다. 아, 지름신 오신다. 젠장."
'끼워팔기' 잘하는 '세기의 사기꾼'!
'문화와 스타일'을 더하고 나서 단위면적당 가장 비싼 가격에 비닐과 나일론을 팔아먹는구나
■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21세기 들어 두드러진 문화현상 중 하나는 명품 신드롬. 구치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짝퉁이라도 조르지오 아르마니 재킷 하나쯤은 입어야 얼굴이 선다고 믿는 증세가 우리 사회를 뒤덮은 지 몇 년째다.
명품을 즐기는 사람들을 무조건 '속물'이나 '된장남녀'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 '명불허전'이라고 했던가? 명예는 헛되이 전해지는 법이 없다. 명품이 명품이라고 불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스트라디바리는 흉내낼 수 없는 바이올린 소리를 만들고, 페라리는 스포츠카 운전이 주는 최고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에르메스나 구치처럼 명품 명가들이 만들어내는 가방을 보라. 바늘 한 땀, 실밥 한 올, 염색 하나도, 짝퉁과는 차원을 달리하지 않는가! 오랜 장인정신이 빚어낸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드는 법이다. 짐작건대, 사람들이 명품을 선호하는 이유는 '함부로 사용해도 성능에 변함이 없고, 아무리 후줄근하게 입어도 품위를 잃지 않으며, 10년을 걸쳐도 변함없는 자기만족을 준다'는 데 있다.
뇌가 명품을 알아보다
미국국립보건원의 뉴로마케팅 연구팀에 따르면, 우리 뇌에는 '장인정신이 빚어낸 명품의 가치'를 탐색하는 뇌 영역이 존재한다. 연구팀은 일반인들 20명을 제각각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 안에 들어가게 한 뒤, '포르셰, 벤츠, BMW' 등 럭셔리 세단으로 알려진 자동차 회사 로고와 '뷰익이나 마쓰다'처럼 싸고 실용적인 세단으로 알려진 자동차 회사 로고를 보여주면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뇌 영역이 어디인지 측정했다. 그 결과 '배측 전전두엽'(dorsolateral prefrontal cortex)으로 불리는, '이마 바로 뒤 뇌 영역'이 럭셔리 세단의 로고를 볼 때 특별한 정보처리 과정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우리보다 오랜 자본주의의 역사를 가진 서양인들에게, 기업 로고는 '제품에 대한 신뢰'와 '오랜 장인정신에 대한 경외감' 같은 것을 연상시키는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명품이 기대만큼 '제품의 질'을 보장하고, 그만큼의 가치를 가격으로 매기는 것은 아니다. 브랜드가 때론 '턱없는 가격'을 상징함으로써 중산층의 얄팍한 계층의식을 자극하거나, 독특한 디자인과 개성적인 스타일, 튀는 마케팅 등으로 '명품의 반열'에 끼어든 경우도 종종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프라다(PRADA)다.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마리오 프라다가 가죽 가방과 구두를 제조하는 회사를 처음 열었을 때만 해도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는 아니었다(1919년에 이탈리아 왕실 공식 지정업체가 됐다고는 하지만). 프라다에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것은 마리오의 손녀딸 미우치아 프라다가 낙하산용 방수천을 얇고 부드럽게 방직해 가죽보다 싸고 실용적인 소재로 가방을 만들면서부터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프라다 천'인데, 이걸로 만든 검은색 '토트백'은 1990년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프라다는 20~30대 일하는 젊은 여성들도 (어렵게나마) 구입할 수 있는 가격으로 토트백을 내놓았고, 명품의 저변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고흐의 그림'만이 아니라 수많은 모조품이 가능한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도 고가의 걸작이 될 수 있듯이, 장인정신이 아닌 '기발한 아이디어와 스타일'만으로도 비닐 가방이 명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참고로, 프라다의 모토는 '우리는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판다!'라고 한다).
순진한 과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프라다는 지난 세기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인 듀폰의 나일론과 비닐을 단위면적당 가장 비싸게 판 '세기의 사기꾼'들이다! 비닐과 나일론으로 만들었기에 복제가 쉬워서, 프라다는 명품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짝퉁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짝퉁의 범람은 진본의 권위를 더욱 높여주는 법! 한국과 일본 사회에서 고가의 가방·구두를 젊은 여성들에게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며, 남편들의 주머니를 가볍게 만들었다.
복제가 쉬워 짝퉁도 가장 많아
단순하면서도 지적이고, 대담하면서도 아름다운 가방과 구두들. 여기에 덧붙여, 프라다는 마케팅도 얄밉도록 잘한다. 그들의 마케팅 중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현대예술과 자사 제품을 병치시킴으로써, 고급 이미지를 강화하고 '문화의 선두주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전위적이면서도 도발적인 현대미술과 영화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제프 쿤스, 데미안 허스트, 애니시 카푸어 등 세계적인 작가들을 지원하고, 트라이베카영화제 등 독립예술영화 진영을 지원하는 일도 꾸준히 해왔다. 또 밀라노 남부의 라르고 이사르코(Largo Isarco)에 대형 창고 부지를 매입해 2013년을 목표로 미술관, 영화관, 아트숍, 카페 등으로 가득 찬 '문화예술 복합공간'을 만들어 '밀라노의 새로운 명물'을 창조하고 있다.
게다가 프라다는 자신의 이름에 '혁신'이라는 이미지를 더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서울 경희궁에 100억원을 쏟아 부어 세계적인 건축가 렘 콜하스와 함께 '트랜스포머'(이 건물은 육각형, 원형, 십자, 사각형을 각면으로 결합한 4면체 구조물이라서,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른 기하학적 형상을 보여준다)라는 건물을 지어 아트 프로젝트를 시도함으로써, '튀는 마케팅'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그 안에 패션·미술·영화 등이 프라다 제품과 맞물리면서, 서울 시민들에게 새로운 미적 경험을 선사하는 방식으로 '프라다' 이름과 함께 '혁신과 창조'라는 이미지를 아로새긴 것이다(이런 미적 경험을 서울 시민에게 선사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이 팔아준 프라다 백과 구두를 생각하면 우리는 이미 대가를 치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트랜스포머 프로젝트'를 경희궁에 세우길 고집했다는 얘기를 듣고 '더욱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혁신을 추구하면서도 고전의 우아함을 함께하려는 그들의 세련됨에 탄복했기 때문이다. ('가장 첨단의 구조물이기에 가장 고풍스런 전통 공간 안에 놓여야 한다'는 그들의 미적 안목을 왜 우리는 한국에선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걸까?) 시민단체들은 우리 문화유산이 외국 명품업체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반대했고, 프라다는 늘 그렇듯 '행사 뒤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복원'해놓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이 프로젝트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명민함마저 보였다. 이렇듯, 프라다는 개성적인 아이디어와 디자인, 전통과 혁신을 잇는 세련된 스타일을 통해 명품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기업과 제품 브랜드 이미지를 평가하는 미국의 한 연구자에 따르면, 최근 미국인들은 '자유롭고, 혁신적이며, 새로운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파이어니어 정신'을 연상시키는 기업을 볼 때 '배측 전전두엽'의 활동이 크게 증가하며, 이때 그 '기업·제품에 대한 선호도'도 최고조에 달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젊은이들이 매출액 1위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나 야후보다, 구글이나 애플을 더 선호하는 것도 '자유롭고 창조적인 기업 이미지' 때문이리라. 그러니 신경과학적인 관점에서 전망하자면, 앞으로 프라다 역시 더욱 두꺼운 팬층을 확보할 것으로 조심스레 예측된다.
브랜드를 넘어 명성을 얻어라
최근 LG는 프라다와 손잡고 '프라다'틱한 디자인과 문양, 그리고 프라다 패션쇼에 쓰이는 6가지 벨소리를 저장한 세계 최초의 풀터치 휴대전화 '프라다폰'을 만들어 100만 대 이상 팔았다. 조만간 180만원이나 되는 '프라다폰 2'도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고가임에도 광고를 하기는커녕 판매처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명품 마케팅' 전략이란 걸 펼치고 있는데, 덕분에 호기심 많은 명품족들의 '측중격핵'(Nucleus Accumbens·욕망을 표상하는 뇌 영역)은 프라다폰을 볼 때마다 어쩔 줄 몰라한다.
우리 기업들이 '프라다'에 배울 것은 '21세기는 브랜드를 넘어 명성(Reputation)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제품의 성능과 질, 가격, 디자인은 브랜드 이미지를 결정하지만, 제품과 함께 파는 '문화'는 기업의 명성을 높인다. 21세기 명품은 브랜드를 잘 만들고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를 넘어 '제품과 함께 기업이 어떤 문화와 스타일을 파는가'로 결정된다. 프라다는 일찌감치 장인정신은 버렸지만, 혁신적이고 세련된 문화를 가방 속에 끼워팔았기에 '21세기 명품의 대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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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님,

이명박 대통령님,
기록 사본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사리를 가지고 다투어 보고 싶었습니다.
법리를 가지고 다투어 볼 여지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열람권을 보장 받기 위하여 협상이라도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버티었습니다.
모두 나의 지시로 비롯된 일이니 설사 법적 절차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감당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미 퇴직한 비서관,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고 하는 마당이니 내가 어떻게 더 버티겠습니까? 내 지시를 따랐던, 힘없는 사람들이 어떤 고초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마당이니 더 버틸 수가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모두 내가 지시해서 생겨난 일입니다. 나에게 책임을 묻되, 힘없는 실무자들을 희생양으로 삼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록은 국가기록원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는 문화 하나만큼은 전통을 확실히 세우겠다”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먼저 꺼낸 말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한 끝에 답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한번도 아니고 만날 때마다, 전화할 때마다 거듭 다짐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했으나 진심으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은근히 기대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을 믿고 저번에 전화를 드렸습니다. 보도를 보고 비로소 알았다고 했습니다.
이때도 전직 대통령 문화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부속실장을 통해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처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연락이 없어서 다시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 차례를 미루고 미루고 하더니 결국 “담당 수석이 설명 드릴 것이다”라는 부속실장의 전갈만 받았습니다.
우리 쪽 수석비서관을 했던 사람이 담당 수석과 여러 차례 통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내가 처한 상황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전직 대통령은 내가 잘 모시겠다” 이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한 만큼, 지금의 궁색한 내 처지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내가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가다듬고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록은 돌려드리겠습니다.
가지러 오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보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통령기록관장과 상의할 일이나 그 사람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국가기록원장은 스스로 아무런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결정을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본 것도 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해 놓은 말도 뒤집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상의 드리는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기록을 보고 싶을 때마다 전직 대통령이 천릿길을 달려 국가기록원으로 가야 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정보화 시대에 맞는 열람의 방법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전직 대통령 문화에 맞는 방법입니까?
이명박 대통령은 앞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적절한 서비스가 될 때까지 기록 사본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 맞습니까?
지금 대통령 기록관에는 서비스 준비가 잘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까?
언제 쯤 서비스가 될 것인지 한 번 확인해 보셨습니까?
내가 볼 수 있게 되어 있는 나의 국정 기록을 내가 보는 것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 것입니까?
공작에는 밝으나 정치를 모르는 참모들이 쓴 정치 소설은 전혀 근거 없는 공상소설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기록에 달려 있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님,
우리 경제가 진짜 위기라는 글들은 읽고 계신지요?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섭니다.
하느님께서 큰 지혜를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08년 7월 16일 16대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의 편지

대통령의 편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저에게는 큰 절을 두번 하는 날입니다.
한 번은 저를 낳고 길러 주신 저의 부모님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또 한번은 저를 대통령으로 낳고 길러 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감사 드리는 절입니다.
저는 경남 김해 산골에서 태어났습니다.
판자 석자를 쓰시는 아버지와
성산이씨셨던 어머니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저도 크게 성공한 사람이지만
돌이켜 보면 부모님이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에
오늘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난을 물려주셨지만 남을 돕는 따뜻한 마음도
함께 물려 주신 아버지셨습니다.
매사에 호랑이 같았던 분이지만
바른 길을 가야 한다는 신념도 함께 가르쳐 주신 어머니셨습니다.
'내가 아프면 나보다 더 아픈 사람,
내가 슬프면 나보다 더 슬픈 사람,
내가 기쁘면 나보다 더 기쁜 사람,'
오늘 그 두 분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바칩니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의 어버이는 국민입니다.
국회의원의 어버이도 국민입니다.
한 인간을 대통령으로 국회의원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국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정치개혁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마음먹기에 달린 일입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나온다'라고 명시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 나라의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군말없이 따라야 하는 지상명령입니다.
여러분의 관심 하나에 이 나라 정치인이 바뀌고
여러분의 결심 하나에 이 나라의 정치는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관심과 결심 또한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어버이는 자식을 낳아 놓고 '나 몰라라'하지 않습니다.
잘 하면 칭찬과 격력를 해주고 잘못하면 회초리를 듭니다.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면 됩니다.
농부는 김매기 때가 되면 밭에서 잡초를 뽑아 냅니다.
농부의 뜻에 따르지 않고 선량한 곡식에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라는 국민의 뜻은 무시하고
사리사욕과 잘못된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는 일부 정치인.
개혁하라는 국민 대다수의 뜻은 무시하고
개혁의 발목을 잡고 나라의 앞날을 막으려 하는 일부 정치인.
나라야 찢어지든 말든 지역감정으로 득을 보려는 일부 정치인.
전쟁이야 나든 말든 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정치인.
이렇게 국민을 바보로 알고 어린애로 아는 일부 정치인들에게
국민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어떤 저항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통령의 의무인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지키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헌법이 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하실 일은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시고
농부의 마음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도 어버이의 회초리를 드십시오.
국민여러분의 회초리는 언제든지 기꺼이 맞겠습니다.
아무리 힘없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그것이 국익의 회초리라면 기쁜 마음으로 맞고 온 힘을 다해
잘못을 고치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 있는 국민이 드는 회초리라도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드는 회초리라면
매를 든 그 또한 국민이기에 맞지 않을 방법은 없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너 내 편이 안되면 맞는다'라는 뜻의 회초리라면
아무리 아파도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큰 뜻을 위배하라는 회초리라면
결코 굴복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기대를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기댈 데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굴복하면 저에게 희망을 걸었던 많은 국민들은
희망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국민 여러분!
그런데 하나 경계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집단이기주의입니다.
저는 대통령이 되기 전,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로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힘있는 국민의 목소리보다
힘없는 국민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체질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할 때는 그 누구에게
혹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 없습니다.
중심을 잡고 오직 국익에 의해 판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중심을 잃는 순간,
이 나라는 집단과 집단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와 통치는 다릅니다. 비판자와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다른 것입니다.
저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익이라는 중심을 잡고 흔들림없이 가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희망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이익집단은 있지만 집단이기주의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와 민족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대한민국.
좀 더 가지고 덜 가진 것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돕는 대한민국.
동(東)에 살고 서(西)에 사는 차이는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대한민국.
바로 화합으로 도약하는 대한민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대 차이는 있지만 세대 갈등은 없는 대한민국입니다.
자식은 부모세대가 민주주의를 유보하며 외쳤던
'잘 살아 보세'를 존중하고
부모는 내 아이가 주장하는 '개혁과 사회정의'를 시대의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자식은 부모에게서 경험을 배우고 부모는 자식에게서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배우는 대한민국.
자식은 밝게 자라게 해 준 부모에게 감사하고
부모는 자식의 밝은 생각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대한민국.
바로 사랑으로 행복한 대한민국입니다.
국민 여러분!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높은 자리, 많은 돈을 갖지 못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부모님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한 것,
사랑하는 아이를 한 번 더 안아 주지 못한 것,
사랑하는 가족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럽답니다.
저도 IMF 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전국의 노동자들을 설득하러 다니느라고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일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저의 이 편지가 부모님의 은혜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
대한민국이라는 가족공동체를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효도 많이 하십시오.
우리 모두의 가슴에
마음으로 빨간 카네이션을 바치며...
2003년 5월 8일
대한민국 새대통령 노무현
Wednesday, May 13, 2009
하나님의 정의
그의 이름은 정의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위한 하나님의 정의
위르겐 몰트만
1977년 저는 6주 동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트리니다드를 돌며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강연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 저는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해방신학자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 자리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진리를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제1세계 신학자”로 취급받는 것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저를 어떤 신학적인 인식으로 인도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 신학”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도 억압하는 자의 해방 신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해방이 억압받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 모두의 인간됨을 위한 해방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류가 억압과 학대와 착취라는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양쪽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해방은 자명한 것입니다.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의 하나이고,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만든 것은 다른 또 하나의 사역입니다.
저는 그 강연 여행에서 돌아와 “억압하는 자의 해방”에 관한 논문을 한 편 썼는데 그 논문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제가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스도교의 모든 주류 신학과 영성이 범하고 있는 근본적인 실수 하나가 얼마나 끔찍스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중세의 고해 성사가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은 자기의 악행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도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죄와 악행의 피해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불의와 폭행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자기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교 교회는 항상 가해자가 죄에서 구원받는 문제에만 골몰했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피해자의 탄원은 흘려듣지 않았습니까? 죄인의 칭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피해자의 칭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아주 세속적인 이유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서구 법률 체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로마의 법률 체계는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예컨대 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벌을 받음으로써 속죄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악행을 보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자는 그냥 도둑질 당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정의, 선한 것은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벌을 주는 정의(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라 공의를 바로 세우고 굽은 것을 곧게 하는 정의, 즉 창조적인 정의입니다.
오늘 강연을 통해서 저는 바로 이 창조적인 정의,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천착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칭의론을 쓰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고자 합니다.
우선 전통적인 참회론(고해성사 Busssakrament)과 신앙론의 결점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가톨릭의 참회 성사는 악의 힘을 “죄”로 규정하고 그것을 인간의 잘못으로 환원시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못한 사람의 죄를 사면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해자 중심의 사유로서 피해자는 완전히 잊히게 됩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부활 없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념과 실천도 철저하게 가해자 중심이고 죄의 종들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이런 사유는 그 죄의 피해자들을 잊어버립니다. 중세의 참회 성사와 마찬가지로 칭의론도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사유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자기 자신의 문제를 안고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사죄의 말씀과 용서의 언약은 인간의 믿음을 수동적인 수용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칭의, 즉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행하시는 적극적인 칭의의 차원을 잃어버립니다.
이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여 죄인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합니다.(롬 4:25)
이와는 달리, 구약성서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구원하는 정의(시 31:1)이며,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입니다. 그 정의는 언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함께 고려하지, 피해자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정의의 목표는 영혼 구원 혹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거하는 새로운 땅입니다.
1.
정의를 향한 외침
피해자: 오늘 우리는 정의를 향한 외침을 어디서 듣고 있습니까? 그 외침은 가해자, 큰 죄를 진 사람한테서 들려오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들, 불의로 인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서 들려옵니다. 그들에게는 정의를 향한 외침이 곧 하나님을 향한 외침입니다. 억압당하는 민중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을 듣습니다.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있는 이 땅 피조물의 신음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정의를 향한 목마름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마저 떠나버린 것만 같은 밑바닥 상황에서 치솟아 오르는 절규입니다. 악의 세력에 힘없이 내맡겨져 있는 고통입니다.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20세기 인간 대학살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또 이른 나이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수, 그 소름끼치는 숫자를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사람의 운명이 있습니다. 그 운명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정의와 하나님을 향한 외침은 인류의 큰 범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연 재해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쓰나미와 싸이클론과 지진은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연일까요? 우연은 변덕스럽고 운명은 눈이 멀었습니다. 범행과 자연 재해의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인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가해자: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또 다른 외침은 가해자의 외침으로, 그 가해자가 자기의 행동을 의식하게 됐을 때 터져 나오는 외침입니다. 가해자들이 희생자를 약탈하거나 억압하거나 심지어 살해했을 때, 그들은 악의 충실한 하수인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시켜서 그런 일을 했거나, 그걸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악의 희생자였습니다. 물론 그 악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희생자들과는 다르지만 가해자들도 악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책을 떠안게 되었고, 점점 더 깊은 악순환에 연루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정의를 향한 가해자들의 외침을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맹목성과, 여러 가지 고발을 대하는 완고함과, 우리 사회의 고통에 대한 냉담함과, 사랑 없음, 냉소주의,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기주의 속에서 그 외침을 인식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과 정의에 대항하는 외침이 될 때가 많습니다. 1944년 한 장교가 러시아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과 정의가 존재한다면,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 때문에 전쟁 이후 독일에 잔인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죄의 희생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상황 속에서(in Gottverlassenheit) 정의를 향해 부르짖는다면, 그 죄의 가해자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in Gottlosigkeit) 하나님에게 저항합니다. 자기들이 행한 잘못을 저주하는 정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체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도 이렇게 거친 인간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 / 하지만 이 세상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네.” 실제로 우리가 악을 경험할 때, 개인적으로 그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경험하거나, 사회적으로 가해자 집단과 피해자 집단 사이에서 경험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사회적 관계, 경제적 구조, 정치적 체계, 즉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체계로서의 악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처럼 사회보장이 잘 돼있는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양분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자를 약자와 분리해 놓는 정치적 체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연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동식물의 다양한 종을 매년 감소시키고 있는 인간 사회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를 희생시켜 가면서 우리의 현재를 즐기고 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의 잘못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입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생명의 힘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체제는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체제 안에서 살고 일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패배자”인 가난한 자, 약한 자, 이 땅, 우리 자녀들에게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는 선이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이런 불의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늘을 향해 소리칩니다. 이런 불의의 체제에 적응해서 살아야 할까요? 여기에 저항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요? 저는 지금 우리의 삶의 조건이 되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만든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체제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 요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니느웨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니느웨”에 살고 있으며 예언자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2.
하나님 - 정의의 태양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정의라는 아주 독특한 개념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개념을 로마적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공의를 세우는 분이며, 공의를 보증해 주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의는 하나님이 친히 맺으신 언약에 대해, 또 그분이 직접 만드신 피조세계에 대해 그분이 보여 주시는 신실함입니다. 제1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런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억압당하던 노예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언약의 땅,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되(시 146: 7, 103, 6)이라고, 그들이 어디에 있건 그렇게 하실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의 권리를 변호하시되(신 10:18, 시 82:3, 사 1:17), 그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권리”에 관심을 가지시니, 이는 이스라엘이 한 때 직접 이방 민족 사이에서 이방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악의 희생자가 된 사람은 시편 31편 1절에 기대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정의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 구원하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자비”(Erbarmen)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의와 자비는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공의를 세우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정의야말로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하나님 체험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 세상 모든 민족과 온 땅을 위한 이스라엘의 희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의 메시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바른 판결을 내립니다.”(사 11:4) 그분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1)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시 96: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의 영을 부어주시면,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정의가 머물 것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가 될 것입니다.”(사 32:15-16) 그러므로 예언자 말라기는 하나님을 “정의의 태양”이라 부릅니다.(말 4:2 - *독일어 성경은 말 3:20)
이 정의 개념은 이집트나 로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온 것입니다. 두 강의 땅[*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의미함]에서는 왕이 곧 재판관이요 태양신 샤마슈(Samas)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태양을 모범으로 삼아 신적인 정의를 집행합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만물이 -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 다시 소생합니다. 그의 인간적인 정의도 이처럼 만물을 살게 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정의롭습니다. 건강한 것은 정의롭습니다. 자연의 법칙에 알맞게 사는 것도 정의롭습니다. 재판은 형벌과는 무관하며, 일으켜 세우고 바로 잡고 치료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왕은 강자가 약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도 자기의 권리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왕은 땅을 인간의 착취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의의 태양” 관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재판과 그분의 심판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이 세상의 구원으로 환영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신다는 산상수훈의 말씀(마 5: 45)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공의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정의로운 분으로 계시합니다. 인간이 악의 지배 아래서 고난을 당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분이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폭력의 희생자들과 연대하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일은 곧 그분이 당하는 일입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가 자기들 편이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정의의 계시가 시작되고 그 정의의 부활이 시작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 - 피해자와 가해자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의 계시
피해자: 우리가 복음서를 펴서 읽으면 그 앞장에서 곧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예수의 처음 시선이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아웃사이더, 그러니까 죄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의 약속에 따르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든 사람에게 치유를 선포하며,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빛을, 억눌린 사람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약속하십니다.(눅 4:18-19) 예수께서 하나님 영의 치유 능력을 병든 사람에게 보이신 것처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의 희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 주십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눅 15:2) 여기서 “죄인과 세리”는 부유한 사람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한 사람들,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해 주심을 의미하며, 그 사람들의 사회적 치유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그들의 영적인 감옥을 깨뜨리시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과 연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희생자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하는 사람은 그런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예수가 걸어간 수난의 길은 죄의 희생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속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에 잘 드러난 것처럼, 그분은 부자유한 종, 능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로써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은 연대의 그리스도론(Solidarität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서가 들려주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포기의 길입니다. 그는 병든 사람들, 악의 희생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으며, 끝내는 당신 스스로 로마 정치 권력의 희생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과 똑같이 - 그 의지가지없는 처지를 오히려 의미 있는 것으로 보셨고, 이 세상에서 내몰린 처지를 하나님에게서 부름 받은 상황으로 보셨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세상, 의롭다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미래마저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선포하셨습니다. 독일속담에서는 “꼴찌”가 개한테 물린다고 하지만[마지막 사람이 불리하다는 뜻],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엎은 예수에 대한 이 세상의 대답입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예수 안에 바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즉 당신처럼 굴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수많은 십자가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권력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걸어간 그 피비린내 나는 길 양편에 늘어선 십자가, 스파르타쿠스의 십자가에서 독일 히틀러 독재의 죽음의 수용소,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군도,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정권의 “실종자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에서 버림 받은 상황 속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버림 받은 사람들의 형제가 되어 주셨고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죽음의 감옥에서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썼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59세의 오스카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대주교의 회심체험이었습니다. 혼 소브리노(Jon Sobrino)는 이렇게 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통해 그에게 나타나셨다 ... 그는 가난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동포들의 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보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인자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너희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 중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자 가운데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은 어디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입니다.
가해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주 일찍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가해자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도 이해했습니다. 가해자들은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모델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세상의 죄를 지시는 분 ... 그분의 상처를 통해 우리의 병을 낫게 하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사 53:5). 이것을 우리는 대속의 그리스도론(Stellvertretung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의를 행하는 우리까지도 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운명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세상 어떤 죄인도 자기 죄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는다면, 그는 모든 자기 존중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비난과 죄에 대한 깨달음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희생자의 눈에서 우리의 죄를 인식하는 순간, 그 죄는 무거운 짐처럼 우리는 내리누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상황이 심각할 경우, 이런 죄의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도대체 죄의 용서라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 누구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거나 과실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모든 죄는 한 사람을 그의 과거에 붙잡아 매고, 미래를 향한 그의 자유를 강탈합니다. 하나님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대량학살은 계속해서 대량학살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어난 죄의 사슬을 풀어 없애시며,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로 만드시고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신다”고 할 때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지시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해자를 죄의 종으로 만드는 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엄청난 사건입니다. 본회퍼가 제대로 말했듯이, 다른 모든 것은 “값싼 은총”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세 단계를 거쳐 일어납니다.
a. 악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그 악을 행한 사람들은 자기의 실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첫 단계는 항상 진리로 진입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가해자들은 언제나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희생자의 오랜 기억에 의지하여야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는 희생자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발견할 때 비로소 자기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b. 두 번째 단계는 의식의 전환이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양산하는 지배 체제를 깨뜨리는 것으로, 또 더 이상 가난한 사람과 자연을 희생시켜서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무 의식 없이 죽임과 죽음을 지향하는 삶에서 의식적으로 생명과 정의를 지향하는 삶에 이르는 것입니다.
c. 가해자가 자기 스스로 일으킨 피해를 없애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오직 그때 가해자도 마침내 희생자들과의 새로운 친교, 정의롭기 때문에 새로운 친교의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복”(Wiedergutmachung)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아무것도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좋아질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해자를 죄의 권세와 죄책의 짐으로부터 해방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가해자를 반드시 희생자의 면전에서 해방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가해자에게 화해를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자 편에 계시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적인 권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면, 그들은 함께 이 죽음의 세력을 만들어 낸 죽음의 혼돈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희생자의 칭의는 가해자의 칭의에 앞서며, 그 둘은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 새로운 창조, 생명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4.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비전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어떤 것을 기대합니까? 전통적으로는 보상과 형벌, 천국과 지옥, 착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 것을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시편 96편 말씀을 한 번 들어봅니다.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주님은 정의로 땅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여기서는 보상과 형벌에 대해서 전혀 얘기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언급은 마지막 줄에만 나오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심은 땅입니다. 창세기 1장 24절에 나오는 것처럼 식물과 동물을 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때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의 치유입니다.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 사이의 모든 파괴된 관계가 바로 잡혀야 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고발과 변호와 선고가 있는 법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바로 잡는 것,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리를 찾아주어, 모두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하며 숲의 나무들도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정의로 땅을 심판하시러 오실 때” 자연은 활짝 피어나 새로운 산물을 내고 하나님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 공동체를 감싸게 됩니다. 모든 것은 썩지 않은 새로운 형체로 변하고 창조주의 영원한 생명력에 참여하니, 이는 그가 “오셔서” 그분의 피조 세계에 영원히 머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하나님의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을 정의로 재판”할 뿐만 아니라(11:4) 이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의 평화를 안겨 주십니다.(11:6-11) 그렇기 때문에 성탄의 이야기에서 천사는 땅과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호의!”(눅 2:14) 천사들은 땅에는 평화를,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호의를 선포합니다.
바울서신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시고, 가해자들을 바로 잡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통일”(엡 1:10)과 “온 우주의 화해”(골 1:20)를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우주적 그리스도론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정의로 땅을 심판하셔서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로운 땅”이 생겨날 것입니다(벧후 3:13).
이 희망은 혼란스러운 자연의 힘이 인간 세계에 일으킨 파괴, 즉 쓰나미, 싸이클론,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그런 파괴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재해를 통해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오실 것이니, 그는 땅을 정의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땅의 심판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이 인간의 세상에 가져온 모든 쓰레기를 치우는 최후의 심판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악의 세상은 해체되고, 죽음의 제국은 끝장나고, 지옥은 파괴됩니다. 그분의 심판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서는 진멸의 No(“아니!”)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빛나는 Yes(“그래!”)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오늘 여기서 죄의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죄의 가해자를 바로잡는 일로 시작된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통한 죄의 극복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지향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으로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희생자로 만드는 힘,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력을 하나님께서 파멸하실 것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칭의가 일어날 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칭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면서 죄와 죽음을 몰아내십니다. 죄와 죽음은 그분의 피조물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는 “강자의 권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누가 재판관이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신약성서에서 그 심판은 “인자의 날”입니다. 그런데 인자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눅 19:10, 마 8:11). 잃어버린 것 가운데 그분이 찾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보복하고 앙갚음하는 분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죄와 죽음과 지옥을 이기고 부활한 승리자로 오실까요? 요한계시록 1장 18절은 그분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열쇠를 가지고 무엇을 하실까요? 분명히 뭔가 잠겨 있던 것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으로,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로 모든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어떤 정의로 심판하실까요? 그분이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를 대할 때 쓰셨던 정의 이외에 다른 어떤 정의로 심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실 심판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분은 이 세상의 고난을 몸소 겪으셨고 이 세상의 죄를 지셨던 분이라는 뜻입니다. 희생자의 권리를 지켜주시고 가해자를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전통은 보상과 형벌의 문제를 대대적으로 결산하는 날에 관해 이야기했고, 결국은 그것이 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정의가 하늘이든 땅에서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누르고 이기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죄와 죽음에 기여하는 결산(Abrechnung)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에 기여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것 바로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이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 영원한 새 창조는 정의에 기초하여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여러 이미지나 관념으로 묘사하면서도 오직 이 세상의 과거만을 볼 뿐 그 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실수입니다.
최후의 심판과 모든 것의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의 새로운 날 아침에 정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시편 96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땅이 기뻐 외치고 들판이 환호하며 나무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한다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공의의 상량식(上梁式 Richtfest)을 고대하며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의 태양이여
우리의 시대에 떠오르소서.”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에 위한 하나님의 정의
위르겐 몰트만
1977년 저는 6주 동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과 트리니다드를 돌며 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강연 여행의 마지막 부분에 저는 두고두고 기억될 만한 해방신학자 회의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회의 자리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지하게 진리를 말했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제1세계 신학자”로 취급받는 것 때문에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해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은 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고, 저를 어떤 신학적인 인식으로 인도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 신학”을 정말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도 억압하는 자의 해방 신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해방이 억압받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 모두의 인간됨을 위한 해방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류가 억압과 학대와 착취라는 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양쪽이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해방은 자명한 것입니다.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역의 하나이고,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만든 것은 다른 또 하나의 사역입니다.
저는 그 강연 여행에서 돌아와 “억압하는 자의 해방”에 관한 논문을 한 편 썼는데 그 논문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제가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그리스도교의 모든 주류 신학과 영성이 범하고 있는 근본적인 실수 하나가 얼마나 끔찍스런 것인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중세의 고해 성사가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은 자기의 악행을 뉘우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도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죄와 악행의 피해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불의와 폭행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서 자기의 권리를 찾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교 교회는 항상 가해자가 죄에서 구원받는 문제에만 골몰했지, 무고하게 고난을 당하는 피해자의 탄원은 흘려듣지 않았습니까? 죄인의 칭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피해자의 칭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저는 아주 세속적인 이유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서구 법률 체계의 토대가 되고 있는 로마의 법률 체계는 일방적으로 가해자 중심입니다. 예컨대 도둑이 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벌을 받음으로써 속죄를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악행을 보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피해자는 그냥 도둑질 당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는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정의, 선한 것은 상을 주고 악한 것은 벌을 주는 정의(justitia distributiva)가 아니라 공의를 바로 세우고 굽은 것을 곧게 하는 정의, 즉 창조적인 정의입니다.
오늘 강연을 통해서 저는 바로 이 창조적인 정의,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천착하고자 합니다. 새로운 칭의론을 쓰고,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그려내고자 합니다.
우선 전통적인 참회론(고해성사 Busssakrament)과 신앙론의 결점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가톨릭의 참회 성사는 악의 힘을 “죄”로 규정하고 그것을 인간의 잘못으로 환원시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잘못한 사람의 죄를 사면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해자 중심의 사유로서 피해자는 완전히 잊히게 됩니다.
2.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부활 없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념과 실천도 철저하게 가해자 중심이고 죄의 종들에게만 국한된 것입니다. 이런 사유는 그 죄의 피해자들을 잊어버립니다. 중세의 참회 성사와 마찬가지로 칭의론도 너무나 개인주의적인 사유입니다. 모든 사람이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홀로 자기 자신의 문제를 안고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사죄의 말씀과 용서의 언약은 인간의 믿음을 수동적인 수용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칭의, 즉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을 행하시는 적극적인 칭의의 차원을 잃어버립니다.
이와는 달리,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여 죄인의 새로운 정의를 주장합니다.(롬 4:25)
이와는 달리, 구약성서가 주장하는 하나님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정의는 구원하는 정의(시 31:1)이며, 악의 희생자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는 정의입니다. 그 정의는 언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함께 고려하지, 피해자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정의의 목표는 영혼 구원 혹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정의가 거하는 새로운 땅입니다.
1.
정의를 향한 외침
피해자: 오늘 우리는 정의를 향한 외침을 어디서 듣고 있습니까? 그 외침은 가해자, 큰 죄를 진 사람한테서 들려오지 않습니다. 폭력의 희생자들, 불의로 인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서 들려옵니다. 그들에게는 정의를 향한 외침이 곧 하나님을 향한 외침입니다. 억압당하는 민중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소리 없는 외침을 듣습니다. 철저하게 약탈당하고 있는 이 땅 피조물의 신음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정의를 향한 목마름을 느낍니다. 이것은 하나님마저 떠나버린 것만 같은 밑바닥 상황에서 치솟아 오르는 절규입니다. 악의 세력에 힘없이 내맡겨져 있는 고통입니다.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20세기 인간 대학살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굶주리고 또 이른 나이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수, 그 소름끼치는 숫자를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는 사람의 운명이 있습니다. 그 운명이 우리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정의와 하나님을 향한 외침은 인류의 큰 범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벌어지는 자연 재해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들려옵니다. 쓰나미와 싸이클론과 지진은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갑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 걸까요?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살아나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연일까요? 우연은 변덕스럽고 운명은 눈이 멀었습니다. 범행과 자연 재해의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운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인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가해자: 하나님과 정의를 향한 또 다른 외침은 가해자의 외침으로, 그 가해자가 자기의 행동을 의식하게 됐을 때 터져 나오는 외침입니다. 가해자들이 희생자를 약탈하거나 억압하거나 심지어 살해했을 때, 그들은 악의 충실한 하수인이었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시켜서 그런 일을 했거나, 그걸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악의 희생자였습니다. 물론 그 악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희생자들과는 다르지만 가해자들도 악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죄책을 떠안게 되었고, 점점 더 깊은 악순환에 연루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정의를 향한 가해자들의 외침을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그 맹목성과, 여러 가지 고발을 대하는 완고함과, 우리 사회의 고통에 대한 냉담함과, 사랑 없음, 냉소주의, 다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이기주의 속에서 그 외침을 인식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나님과 정의에 대항하는 외침이 될 때가 많습니다. 1944년 한 장교가 러시아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하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과 정의가 존재한다면, 유대인에 대한 대량학살 때문에 전쟁 이후 독일에 잔인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죄의 희생자들이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상황 속에서(in Gottverlassenheit) 정의를 향해 부르짖는다면, 그 죄의 가해자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in Gottlosigkeit) 하나님에게 저항합니다. 자기들이 행한 잘못을 저주하는 정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체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우리도 이렇게 거친 인간이 아니라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었어. / 하지만 이 세상의 상황은 그렇지 못했네.” 실제로 우리가 악을 경험할 때, 개인적으로 그 악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경험하거나, 사회적으로 가해자 집단과 피해자 집단 사이에서 경험할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사회적 관계, 경제적 구조, 정치적 체계, 즉 우리의 행동을 규제하는 체계로서의 악을 경험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일처럼 사회보장이 잘 돼있는 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을 승자와 패자로 양분하는 경쟁 사회 속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자를 약자와 분리해 놓는 정치적 체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자연을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동식물의 다양한 종을 매년 감소시키고 있는 인간 사회 속에서 먹고 마시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 세대를 희생시켜 가면서 우리의 현재를 즐기고 있으며,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 세대의 잘못 때문에 비싼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될 상황입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는 생명의 힘만이 아니라 죽음의 세력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체제는 정의롭지 않은 체제이며, 그 체제 안에서 살고 일하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듭니다. “패배자”인 가난한 자, 약한 자, 이 땅, 우리 자녀들에게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행하는 악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지 않는 선이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이런 불의한 체제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불의가 하늘을 향해 소리칩니다. 이런 불의의 체제에 적응해서 살아야 할까요? 여기에 저항한다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까요? 저는 지금 우리의 삶의 조건이 되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만든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체제를 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 요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처럼, 니느웨도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니느웨”에 살고 있으며 예언자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2.
하나님 - 정의의 태양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정의라는 아주 독특한 개념과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개념을 로마적 개념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공의를 세우는 분이며, 공의를 보증해 주는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의는 하나님이 친히 맺으신 언약에 대해, 또 그분이 직접 만드신 피조세계에 대해 그분이 보여 주시는 신실함입니다. 제1계명에 따르면 하나님은 아무런 법적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억압당하던 노예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언약의 땅, 자유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공의를 세우”시되(시 146: 7, 103, 6)이라고, 그들이 어디에 있건 그렇게 하실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 하나님은 “과부와 고아”의 권리를 변호하시되(신 10:18, 시 82:3, 사 1:17), 그들이 어떤 사람이건 그렇게 하십니다. 그분은 “이방인의 권리”에 관심을 가지시니, 이는 이스라엘이 한 때 직접 이방 민족 사이에서 이방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악의 희생자가 된 사람은 시편 31편 1절에 기대어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정의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권리를 찾아주는 정의, 구원하고 치유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자비”(Erbarmen)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의와 자비는 서로 모순이 아닙니다.
이렇듯 해방하는 정의, 공의를 세우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정의야말로 이스라엘의 근원적인 하나님 체험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 세상 모든 민족과 온 땅을 위한 이스라엘의 희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스라엘의 언약의 메시야는 “가난한 사람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바른 판결을 내립니다.”(사 11:4) 그분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1)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시 96:13)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의 영을 부어주시면, “광야에 공평이 자리 잡고, 기름진 땅에 정의가 머물 것입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가 될 것입니다.”(사 32:15-16) 그러므로 예언자 말라기는 하나님을 “정의의 태양”이라 부릅니다.(말 4:2 - *독일어 성경은 말 3:20)
이 정의 개념은 이집트나 로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온 것입니다. 두 강의 땅[*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의미함]에서는 왕이 곧 재판관이요 태양신 샤마슈(Samas)의 제사장입니다. 그는 태양을 모범으로 삼아 신적인 정의를 집행합니다.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만물이 -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 다시 소생합니다. 그의 인간적인 정의도 이처럼 만물을 살게 합니다.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정의롭습니다. 건강한 것은 정의롭습니다. 자연의 법칙에 알맞게 사는 것도 정의롭습니다. 재판은 형벌과는 무관하며, 일으켜 세우고 바로 잡고 치료하는 것과 연관됩니다. 그러므로 왕은 강자가 약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고, 과부와 고아도 자기의 권리를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왕은 땅을 인간의 착취로부터 보호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의의 태양” 관념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재판과 그분의 심판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이 세상의 구원으로 환영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태양을 떠오르게 하신다는 산상수훈의 말씀(마 5: 45)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공의를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정의로운 분으로 계시합니다. 인간이 악의 지배 아래서 고난을 당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분이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폭력의 희생자들과 연대하십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일은 곧 그분이 당하는 일입니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의가 자기들 편이라는 것을 느낄 때 그 정의의 계시가 시작되고 그 정의의 부활이 시작됩니다.
3.
예수 그리스도 - 피해자와 가해자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의 계시
피해자: 우리가 복음서를 펴서 읽으면 그 앞장에서 곧 바로 알게 되는 것은, 예수의 처음 시선이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아웃사이더, 그러니까 죄의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머물렀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 61장 1절의 약속에 따르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든 사람에게 치유를 선포하며,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는 빛을, 억눌린 사람에게는 그들의 권리를” 약속하십니다.(눅 4:18-19) 예수께서 하나님 영의 치유 능력을 병든 사람에게 보이신 것처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폭력의 희생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 주십니다. “이 사람이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눅 15:2) 여기서 “죄인과 세리”는 부유한 사람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한 사람들, 공동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받아들인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인정해 주심을 의미하며, 그 사람들의 사회적 치유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멸시와 천대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그들의 영적인 감옥을 깨뜨리시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들과 연대하심으로써 하나님이 희생자들과 연대하신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을 통해서 계시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하는 사람은 그런 희생자들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까지 예수가 걸어간 수난의 길은 죄의 희생자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 속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에 잘 드러난 것처럼, 그분은 부자유한 종, 능욕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로써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버림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되돌려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은 연대의 그리스도론(Solidarität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통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복음서가 들려주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는 점점 더 깊은 포기의 길입니다. 그는 병든 사람들, 악의 희생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쏟아 부으셨으며, 끝내는 당신 스스로 로마 정치 권력의 희생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것과 똑같이 - 그 의지가지없는 처지를 오히려 의미 있는 것으로 보셨고, 이 세상에서 내몰린 처지를 하나님에게서 부름 받은 상황으로 보셨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의 세상, 의롭다 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미래마저 빼앗긴 사람들에게 그분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선포하셨습니다. 독일속담에서는 “꼴찌”가 개한테 물린다고 하지만[마지막 사람이 불리하다는 뜻],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첫째”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엎은 예수에 대한 이 세상의 대답입니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처럼 예수 안에 바로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들에게, 즉 당신처럼 굴욕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수많은 십자가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서 권력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걸어간 그 피비린내 나는 길 양편에 늘어선 십자가, 스파르타쿠스의 십자가에서 독일 히틀러 독재의 죽음의 수용소,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군도,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정권의 “실종자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에서 버림 받은 상황 속으로 친히 들어오셔서 버림 받은 사람들의 형제가 되어 주셨고 그들을 고통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죽음의 감옥에서 “오직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썼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59세의 오스카 로메로(Oscar Arnulfo Romero) 대주교의 회심체험이었습니다. 혼 소브리노(Jon Sobrino)는 이렇게 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을 통해 그에게 나타나셨다 ... 그는 가난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동포들의 눈에서 일그러진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에 보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인자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너희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희생자 중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자 가운데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은 어디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대답입니다.
가해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아주 일찍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가해자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도 이해했습니다. 가해자들은 이사야 53장에 등장하는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모델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세상의 죄를 지시는 분 ... 그분의 상처를 통해 우리의 병을 낫게 하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사 53:5). 이것을 우리는 대속의 그리스도론(Stellvertretungschristologie)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의를 행하는 우리까지도 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당신의 운명을 통해 계시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고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습니까?
저는 이 세상 어떤 죄인도 자기 죄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을 안고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인이 자기 죄를 깨닫는다면, 그는 모든 자기 존중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대한 비난과 죄에 대한 깨달음을 거부합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희생자의 눈에서 우리의 죄를 인식하는 순간, 그 죄는 무거운 짐처럼 우리는 내리누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상황이 심각할 경우, 이런 죄의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도 전혀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도대체 죄의 용서라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 누구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리거나 과실을 보상할 수 없습니다. 모든 죄는 한 사람을 그의 과거에 붙잡아 매고, 미래를 향한 그의 자유를 강탈합니다. 하나님도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대량학살은 계속해서 대량학살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일어난 죄의 사슬을 풀어 없애시며,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로 만드시고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신다”고 할 때 바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 세상의 죄를 지시는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가해자를 죄의 종으로 만드는 죄의 세력에 대하여는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엄청난 사건입니다. 본회퍼가 제대로 말했듯이, 다른 모든 것은 “값싼 은총”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세 단계를 거쳐 일어납니다.
a. 악에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인식함으로써 그 악을 행한 사람들은 자기의 실상을 인식하게 됩니다. 첫 단계는 항상 진리로 진입하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아픈 것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가해자들은 언제나 기억력이 나쁘기 때문에, 희생자의 오랜 기억에 의지하여야 자기 인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가해자는 희생자의 눈에 비친 자기를 발견할 때 비로소 자기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b. 두 번째 단계는 의식의 전환이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양산하는 지배 체제를 깨뜨리는 것으로, 또 더 이상 가난한 사람과 자연을 희생시켜서 사는 삶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무 의식 없이 죽임과 죽음을 지향하는 삶에서 의식적으로 생명과 정의를 지향하는 삶에 이르는 것입니다.
c. 가해자가 자기 스스로 일으킨 피해를 없애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때, 오직 그때 가해자도 마침내 희생자들과의 새로운 친교, 정의롭기 때문에 새로운 친교의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회복”(Wiedergutmachung)이라고 부릅니다. 비록 아무것도 다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좋아질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해자를 죄의 권세와 죄책의 짐으로부터 해방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가해자를 반드시 희생자의 면전에서 해방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가해자에게 화해를 제안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희생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희생자 편에 계시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신적인 권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가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면, 그들은 함께 이 죽음의 세력을 만들어 낸 죽음의 혼돈을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희생자의 칭의는 가해자의 칭의에 앞서며, 그 둘은 이 세상을 더욱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 새로운 창조, 생명의 부활이라고 부릅니다.
4.
최후의 심판에 대한 새로운 비전
우리는 최후의 심판에서 어떤 것을 기대합니까? 전통적으로는 보상과 형벌, 천국과 지옥, 착한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악한 사람들은 저주를 받는 것을 생각합니다. 맞습니까? 시편 96편 말씀을 한 번 들어봅니다.
“하늘은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 외치며,
바다와 거기에 가득 찬 것들도 다 크게 외쳐라.
들과 거기에 있는 모든 것도 다 기뻐하며 뛰어라.
그러면 숲 속의 나무들도 모두 즐거이 노래할 것이다.
주님이 오실 것이니, 주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주님은 정의로 땅을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뭇 백성을 다스리실 것이다.”
여기서는 보상과 형벌에 대해서 전혀 얘기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언급은 마지막 줄에만 나오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심은 땅입니다. 창세기 1장 24절에 나오는 것처럼 식물과 동물을 내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땅을 심판하러 오실 때 중심이 되는 것은 자연의 치유입니다.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 사이의 모든 파괴된 관계가 바로 잡혀야 합니다. 여기서 “심판”은 고발과 변호와 선고가 있는 법정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오히려 바로 잡는 것,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권리를 찾아주어, 모두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즐거워하고, 땅은 기뻐하며 숲의 나무들도 기쁨의 찬양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정의로 땅을 심판하시러 오실 때” 자연은 활짝 피어나 새로운 산물을 내고 하나님의 평화는 모든 피조물 공동체를 감싸게 됩니다. 모든 것은 썩지 않은 새로운 형체로 변하고 창조주의 영원한 생명력에 참여하니, 이는 그가 “오셔서” 그분의 피조 세계에 영원히 머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하나님의 메시아는 “가난한 사람을 정의로 재판”할 뿐만 아니라(11:4) 이 땅과 거기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창조의 평화를 안겨 주십니다.(11:6-11) 그렇기 때문에 성탄의 이야기에서 천사는 땅과 사람을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땅에는 평화, 사람들에게는 호의!”(눅 2:14) 천사들은 땅에는 평화를,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호의를 선포합니다.
바울서신은 그리스도께서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 주시고, 가해자들을 바로 잡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의 통일”(엡 1:10)과 “온 우주의 화해”(골 1:20)를 이루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것은 우주적 그리스도론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정의로 땅을 심판하셔서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로운 땅”이 생겨날 것입니다(벧후 3:13).
이 희망은 혼란스러운 자연의 힘이 인간 세계에 일으킨 파괴, 즉 쓰나미, 싸이클론, 지진과 같은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그런 파괴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은 자연 재해를 통해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오실 것이니, 그는 땅을 정의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땅의 심판과는 다른 모습으로 하실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은 죄와 악과 죽음의 세력이 인간의 세상에 가져온 모든 쓰레기를 치우는 최후의 심판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악의 세상은 해체되고, 죽음의 제국은 끝장나고, 지옥은 파괴됩니다. 그분의 심판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서는 진멸의 No(“아니!”)이지만,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게는 빛나는 Yes(“그래!”)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오늘 여기서 죄의 희생자들의 권리를 찾아주고 죄의 가해자를 바로잡는 일로 시작된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통한 죄의 극복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을 지향합니다. 어떤 사람은 종으로 만들고 또 어떤 사람은 희생자로 만드는 힘,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력을 하나님께서 파멸하실 것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칭의가 일어날 때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칭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당신의 권리를 주장하시면서 죄와 죽음을 몰아내십니다. 죄와 죽음은 그분의 피조물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의 권리를 무시하는 “강자의 권리”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누가 재판관이 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신약성서에서 그 심판은 “인자의 날”입니다. 그런데 인자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것을 찾으러 오신 분입니다(눅 19:10, 마 8:11). 잃어버린 것 가운데 그분이 찾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실 그리스도께서 보복하고 앙갚음하는 분으로 오실까요, 아니면 죄와 죽음과 지옥을 이기고 부활한 승리자로 오실까요? 요한계시록 1장 18절은 그분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열쇠를 가지고 무엇을 하실까요? 분명히 뭔가 잠겨 있던 것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신 분으로,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로 모든 죽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것입니다. 어떤 정의로 심판하실까요? 그분이 죄의 희생자와 가해자를 대할 때 쓰셨던 정의 이외에 다른 어떤 정의로 심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실 심판관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입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심판자로 오시는 분은 이 세상의 고난을 몸소 겪으셨고 이 세상의 죄를 지셨던 분이라는 뜻입니다. 희생자의 권리를 지켜주시고 가해자를 바로 잡으시는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은 어떤 목적을 위한 것입니까? 우리의 전통은 보상과 형벌의 문제를 대대적으로 결산하는 날에 관해 이야기했고, 결국은 그것이 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날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정의가 하늘이든 땅에서든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세력을 누르고 이기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은 죄와 죽음에 기여하는 결산(Abrechnung)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에 기여하는 심판입니다. 심판은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것 바로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말씀은 이것입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 영원한 새 창조는 정의에 기초하여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는 승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여러 이미지나 관념으로 묘사하면서도 오직 이 세상의 과거만을 볼 뿐 그 심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을 보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교 전통의 실수입니다.
최후의 심판과 모든 것의 새로운 창조는 하나님의 새로운 날 아침에 정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시편 96편에 나와 있는 것처럼, 땅이 기뻐 외치고 들판이 환호하며 나무들이 손뼉을 치며 노래한다면, 우리 인간도 하나님의 공의의 상량식(上梁式 Richtfest)을 고대하며 노래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의 태양이여
우리의 시대에 떠오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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